서울 청와대 외교안보센터.
윤현우 대통령은 단 한 장의 외교 전문에 서명했다. 그 안에는 단 두 줄의 제안이 담겨 있었다.
“미군이 철수한다면, 중국군도 함께 철수하십시오.
대신, 귀국의 안보 우려를 UN 결의에 포함시켜 드리겠습니다.”
서명 직후, 전문은 베이징으로 송신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 정부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중국에 영상 회의를 제안했다. 윤현우는 창밖으로 어둑한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제, 바로 대화로 갑니다.”
하루 뒤, 베이징 인민대회당.
정면의 거대한 오성홍기 아래, 영상 회의용 스크린이 세워졌다. 양국의 국기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화면 너머로 윤현우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의 앞에는 이미 제안서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중국은 여전히 북부 점령지를 비우지 않았다. 랴오닝과 지린 접경의 전차부대, 평양 북부까지 이어진 철도 보급선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리웨이 주석, 시진핑을 연상시키는 노련한 지도자가 화면 속 윤현우를 바라봤다. 그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탁자를 두드렸다.
“대통령 동지, 그대들은 너무 빠릅니다. 역사에 그렇게 앞서가면, 모두가 불안해지지요.”
윤현우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불안은 과거에 머무는 자들의 감정입니다. 우리는 이제 미래로 가야 합니다.”
리웨이는 문서를 천천히 넘기며 낮게 물었다.
“만약 우리가 철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윤현우는 단호했다.
“중국이 원하는 건 결국 완충지대 아닙니까? 우리는 그걸 이해합니다. 그래서 미군을 이 땅에 두지 않겠다고 약속드린 겁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귀국이 계속 우리 영토에 머문다면, 우리는 미군이 요구하는 북부 미사일 배치를 승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회의장은 조용해졌다. 한동안 펜 소리도 멈췄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계산이 끝난 통보였다.
리웨이는 잠시 윤현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윤현우가 답했다.
“어느 쪽이든 균형은 유지될 겁니다. 다만 그 균형이 귀국에게 유리하길 바랄 뿐입니다.”
리웨이는 의자를 천천히 밀며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는 계산이 빠르지만, 결단에는 숙고가 필요하니까요.”
그날 밤, 베이징 중난하이.
리웨이 주석은 외교부와 국방부, 중앙군사위원회의 핵심 참모들과 마주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한국의 제안서 사본과 함께, 미군 항모전단의 배치도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국방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국의 핵보유 가능성, 거의 확실시됩니다. 공식 발표는 없지만, 정보국은 이미 관련 징후를 다수 확보했습니다.”
외교부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철수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북한 지역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승인받을 겁니다.
베이징까지 비행시간, 7분입니다.”
리웨이는 잠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철수하면,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되죠?”
국방부장은 침착하게 답했다.
“일시적 영향력의 약화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UN 결의에 ‘중국 국경 안보 우려’가 명시된다면, 우리는 외교적 완충지대를 확보하게 됩니다.”
외교부장은 거기에 덧붙였다.
“동시에, 한국은 공식적으로는 중립국 선언을 피하고 있지만, 외교적 중재자 역할을 자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리웨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세먼지로 뿌연 야경 속에서, 남쪽을 향한 시야가 아득했다.
“한반도가 미국도, 우리도 아닌 제3의 영역이 된다면... 그건 곧 우리가 밀어낼 필요 없는, 그러나 넘어서면 위험한 ‘완충선’이 될 수 있다는 뜻이군.”
회의장은 조용했다. 그 순간, 그는 결정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날 오전, 영상 회의가 재개되었다. 화면 속 윤현우는 전날과 다름없이 침착한 표정이었다. 리웨이는 화면을 잠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조용했다. 그리고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건부 철수, 수락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요청이 있습니다. 북중 상호방위조약, 그 조약을 폐기하지 않고, 통일 한국과의 상호안보협정으로 형식적으로라도 유지하고자 합니다.”
윤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 수용합니다. 우리는 그 조약이 작동하지 않을 거란 걸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립을 향한 약속의 형식이 된다면, 남겨두는 것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리웨이는 미소도, 경계도 아닌 담담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형식이 때로는 말보다 강한 메시지가 되기도 하지요.”
윤현우가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의 목표는 분리된 안보가 아닙니다. 서로의 경계를 넘지 않는 존중 위에 선, 새로운 평화입니다.”
그 순간, 회의장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양국 참모들의 시선이 교차했지만,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모든 화면이 천천히 암전 되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경을 넘지 않는 조건’을 현실로 만들었다. 조약은 남았지만, 중국은 더 이상 이 땅에 간섭할 수 없었다. 과거는 봉인되었고, 미래는 이제 주권자의 손안에 있었다.
그날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 “중국, 조건부 철수 수락”이라는 속보가 전광판을 타고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환호가 터졌고, 태극기와 한반도기가 밤바람에 펄럭였다.
청와대. 윤현우는 조용히 창가에 서 있었다. 밖에서는 환호성이 이어졌지만, 그의 표정은 차분했다.
“국경을 지킨다는 건… 단지 땅을 지키는 게 아니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그게 진짜 주권이지.”
탁자 위, 문서 한 장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서류 상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중국군 한반도 북부 철수 및 상호안보협의에 관한 잠정합의서》
“한반도의 완전한 주권 회복을 목표로 하며, 국경선은 존중하되, 영향력은 넘지 않는다.”
윤현우는 펜을 들어 서명했다. 그리고 조용히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이제 진짜 균형이 시작되는 거군.”
그로부터 며칠 뒤, 조간신문들의 1면이 일제히 같은 제목을 달고 나왔다.
《망명 중이던 북한 최고지도자, 베이징 관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중국 외교부는 “건강 악화에 따른 급성 심정지”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청와대 외교안보센터에 전달된 보고서에는 전혀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서지훈 국가안보실장이 말없이 봉투 하나를 꺼내 대통령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에는 단순히 ‘대상: 북한 최고지도자’이라 적혀 있었고, 부속 메모는 다음 한 줄로 요약돼 있었다.
“독극물 가능성 있음, 중국 내부 지시 정황 다수 확보됨.”
윤현우는 문서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조용히 덮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창밖으로 머물렀다 돌아왔다.
서지훈이 낮게 말했다.
“중국이 과거와의 모든 연결을 스스로 끊었습니다.”
대통령은 고개를 들지도,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차분히 중얼거렸다.
“정리되지 않은 끈을 남겨두고는, 새 질서를 설계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말이 끝나자 방 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이제 이 땅 위에 남은 건, 방해자가 아닌 설계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