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사랑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다
외로운 날들이 있다. 그 무수한 날들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회색일까. 세상이 온통 뿌옇고 잿더미 같아서 나는 곧잘 의기소침해진다. 그 중 최고로 외로운 날을 꼽자면 아무래도, 비가 오는 날이다.
축축하다. 그리고 적적하다. 이날 하늘의 날씨는 꼭 내 마음을 빗대어 만든 것 같다. 위에서 쏟아지는 것이 빗물인가, 눈물인가 헷갈리기까지 한다. 비가 내려 내 마음이 우는 걸까, 내가 울어 비가 내리는 걸까. 깊은 속에서 응어리 진 무언가를 차마 풀어볼 용기도 없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온통 회색이다. 하늘도, 공기도, 거울 속의 내 표정도 모두 회색이다. 이런 날의 습관이 하나 있다면, 모순적이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온도, 습도, 냄새가 내 머릿속에 저장돼서 영영 지워지지 않을까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외로운 오늘을 기억하게 만드는 추억, 그게 아니라면 좌절, 또 그게 아니라면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만 같은 비참함. 하나로 정의할 수 없지만 언젠가 이 날을 떠올렸을 때 느끼게 될 슬픈 향수가 두려워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래서 나의 오늘이 회색일 때는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모든 것이 멈춘다. 그것은 항상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전화 한 통마저 힘들다. 회색인 나의 오늘때문에 그의 오늘이 물들까봐 두렵다. 그를 기억할 때 이 외로운 감정마저 기억하게 될까봐 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도망쳤다.
오늘 하루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비가 왔고, 외로웠고, 무거웠다. 난 나의 두려움을 핑계 삼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핑계가 핑계임을 인지하게 된 건, 오롯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내가 바퀴벌레가 어떻게 할 거야?"
가볍게 물어본 나의 질문에 아버지는 늦은 밤 전화를 거셨다. 당신께서는 네가 바퀴벌레가 되어도 예뻐서 평생 데리고 살 거라고, 바퀴벌레 할아버지가 되어도 마냥 예쁘다고 말했다. 비가 왔고, 세상은 온통 회색이었고, 나는 울었다.
축축한 비 냄새, 어스름하게 빛이 나던 가로등, 그리고 당신의 취한 듯한 목소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문득 비오는 날의 지하철 5번 출구가 죽을 때까지 날 울게 만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비 오는 날이면 여기 이 장소가 생각나게 될 거라고, 그래서 평생 날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불현듯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그 날은 주말이었고, 오랜만에 당신과 단 둘이 저녁을 먹었다. 나는 그에게 매주 주말에 올라오는 게 힘들지 않냐고 물었고, 그는 너희들이 내 비타민이라 일주일을 버티려면 올라와야 한다고, 안 그러면 살 수가 없다고 답했다. 내 눈시울은 금세 붉어졌고, 나는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내내 무뚝뚝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버지의 반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볍게 던진 질문에 나는 항상 큰 감동을 받아왔는데, 왜 그걸 모르고 살았을까.
난 역시 그의 사랑의 크기를 평생 가늠하지 못하겠지.
2023. 04.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