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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치규 Oct 13. 2024

한강에 대한 성급한 이념 논쟁

비판보다 우선 이해와 공감을 기대하며...

문학은 역사학이나 정치학, 사회학이 아닙니다. 엄밀한 논리와 비판에 근거해 말하는 로고스(logos)보다는 그저 재미있고 의미있는 것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미토스(mythos)에 가깝습니다. 논리적인 적합성이나 사실 여부가 아니라 들을 만하고 읽을 만하면 존재가치를 가지는 것이 문학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문학은 승자의 승전보나 가해자의 변명보다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넋두리나 절규를 담는 경우가 더 많고 그런 경우에 진실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학에 대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태도는 듣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태도입니다.


5.18이나 4.3 등을 다룬 한강의 작품에 대해 벌써부터 벌어지고 있는 이념적인 논쟁은 그래서 지나치고 성급한 느낌이 듭니다. 5.18이나 4.3 등은 우리 공동체가 함께 겪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며 많은 상처를 남긴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어느 쪽에 서 있든 고통을 당한 자의 목소리를 담은 것이라면 우선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고통의 절규가 왜곡되고 치우친 것이라면 결국 다른 입장의 문학 작품이 나와 균형을 잡을 것이며 학문적인 논구를 통해 차차 교정될 것입니다. 귀를 기울여 듣고 공감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고 성급하게 비판부터 하는 것은 문학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며 그런 고통스러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더 성숙해지고 한 단계 더 높은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채식이 옳은 것이냐, 윤리를 넘어선 에로스가 가당한 것이냐, 5.18이나 4.3을 좌파적 입장에서 옹호하는 것이냐는 등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런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흐름이나 거대한 사건을 만나 무기력한 한 개인으로 찢겨 고통당한 자들의 상처를 드러낸 문학의 본질적인 성취보다는 2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직접적으로 그리는 문학은 오히려 자신의 삶의 세계, 생활세계의 부분성으로 인해 편파적일 수도 있습니다. 장발장이 혁명 대열에 선 것이, 안나 카레니나가 불륜을 저지르고 생명을 버린 것이 옳은지를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일차적인 문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더 긴 호흡을 가지고 한강의 작품을 읽고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라는 것이 성급하고 대립적인 우리 사회를 향해 노벨문학상이 주어진 의미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더 깊이 감사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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