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산 / 3장

3장. 산 그늘 아래서

by Everett Glenn Shin

윤성은 며칠간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며 계속 호랑이의 그 눈빛을 떠올렸고, 산에 다시 오르고 싶다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성은 시내의 한 카페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내리던 눈이 조금씩 잦아들 무렵 문이 열리고 검은 롱패딩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해요, 눈 때문에 차가 막혀서요.정윤성 대위, 맞으시죠? 연락 주셔서 놀랐습니다.”

“채명아씨 맞죠? 동물보호연대에서 활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군인이 저희에게 접촉해 오는 일은 흔하지 않아서요. 게다가, 작전 중이셨다면서요?”

윤성은 머뭇거리다 말문을 열었다.

“호랑이를 마주쳤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그런데, 쏘지 못했습니다.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네요. 그건 단순한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명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윤성 쪽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연락하신 겁니까?”

“그 개체는 제거해야 할 맹수같은 것이 아닙니다,

”호랑이는 인간을 공격한 것도, 자신을 방어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경계선을 넘은 인간을 응시한 겁니다.

“당신은 정말로 산군을 만난 거군요.”

“산군..이요?

”네 단순한 동물이나 추적기와 개체번호가 붙은 관찰해야 할 대상이 아닌 자연 그 자체인 존재,

당신도 느꼈던 것 같은데요.

”네 정확히 말로 표현은 못하겠지만 알 것 같습니다.

“정대위님, 그래서 이제부턴 어찌하실 계획인가요?

군인은 명령에 불응하면 설 자리가 없을 텐데요.”

“일단은 지켜보고자 합니다.”

“저희와 함께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네. 그런 걸로 하죠.”

며칠 뒤, 작전은 국내외 매체들을 통해 보도되었다..
‘한국 정부, 멸종위기 호랑이 소탕 군사작전 투입’
‘ 보호구역에서의 희귀 야생동물 포획 사살 시도’
환경 단체들의 비난 성명이 쏟아졌다.
서울과 뉴욕, 베를린에서 동시에 시위가 벌어졌고, 산그늘 마을 입구에는 피켓을 든 이들이 모여들었다.
‘호랑이는 죄가 없다.’, ‘호랑이를 쏘지 마세요.’

명아와의 만남 이후, 윤성은 공식 작전 보고서에서 빠졌다.

군 내부에선 ‘정윤성 대위가 현장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전역 조치됐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진실은 조금 더 단순하고도 깊었다.

그리고, 더 이상 대위 정윤성이 아닌 동물보호연대 강원도지부 부팀장 정윤성이 되어 있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보호연대 사람들도 곧 알게 되었다.
그는 단순한 동조자가 아니었다.

GPS 기기를 꺼내고,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브리핑하고, 무전기의 코드를 정비하는 그의 손놀림은 여전히 군인이었다.
하지만, 눈빛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산으로부터 사람을 지키기 위해 썼던 능력을
이제는 산을 지키기 위해 쓰고 있었다.

“산군은 지금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겠죠.”명아가 말했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가 더 중요하니까.”명아의 이야기에 윤성은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밤마다 그날 보았던 눈빛을 떠올렸다.
깊고, 오래된 침묵의 눈.
산신이라 불려 마땅한 존재.

그날의 산군은 사라졌지만, 윤성은 그것이 마지막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시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이 산에 대한 존중 없이 그늘진 산에 발자취를 남기려 할 때 다시 나타나 그 눈빛으로 경고할 것이다.

윤성은 문득 산에 들어가고 싶다 생각하며 자신의 사무실 창가에 서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명아가 들어왔다. 그녀의 옆에는 키는 크지 않지만 다부진 체형으로 단단한 느낌을 주는 백인 남성이 서 있었다.

“창밖에 뭐 볼게 있나요?윤성씨한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왔어요.”

“아뇨, 그냥 산에 들어가고 싶어서 생각중이었어요.”

“잘됐네요. 이쪽은 BBC의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데이비드 네빌씨이시고 한국호랑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으시다고 하시네요.

촬영에 동행하며 안내해줄 사람을 구하고 계시다고 하는데, 딱 윤성씨가 적임자로 보여서요.

촬영은 2주 뒤부터 진행할 예정이고요, 산그늘마을 인근 산에 대한 촬영 허가는 맡아 놓은 상태입니다.” 명아가 네발을 대신하여 윤성에게 전반적인 촬영 계획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포수는 구했나요?”

“저희는 촬영을 하러 가는 거에요, 사냥이 아니라구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자는 겁니다.“

”따로 구하지 않으신 듯 하니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윤성과 네빌의 만남으로부터 한달 뒤 산그늘 마을 마을회관 앞 공터에는 촬영팀의 베이스캠프가 들어서기 시작했다.캠프가 세워진 뒤 삼일째 되던 날 캠프 입구 부근에서 산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이던 윤성에게 한 남자가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충성,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그는 윤성이 호랑이와 마주쳤을 때에 함께 순찰했던 길태호 중사였다.

“경례같은거 하지 말고 편하게 해. 요새 어떻게지냈어?”

“네,저도 얼마 전에 전역하고 고향에서 부모님 농사일 도우며 가끔 멧돼지나 잡고 있슴다.”

“나 때문에 전역당하거나 한건 아니지?”

“에이 아녜요, 저도 슬슬 더 나이들기 전에 농사일을 물려받고 모시고 살려던 참이었어요.”

“촬영팀쪽은 9시쯤이면 준비가 끝날 것 같다고 하네요.

두 분도 그때까지 준비 부탁드려요. 전 당장이라도 출발 가능합니다”

명아는 어느새 통역은 물론 전반적인 시간 조율 등의 총괄업무까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동쪽능선부터 시작하는게 좋겠지..?”윤성이 산봉우리들을 한 바퀴 돌아 바라보며 말했다.

“순찰루트겠군요.. 크큭”

30여분 뒤 윤성은 베이스캠프 한켠에 마련된 화이트보드에 지도를 걸어놓고 동선설명을 시작했다.

“오늘은 동쪽 능선으로 올라가 서쪽 능선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돌아보면 좋을 것 같아요. 특별히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눈이 꽤 오는 만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듯 합니다.”

“윤성씨, 혹시 비디오카메라 촬영해본 적 있어요?촬영팀 보조 한명이 아침에 눈길에 미끄러져 발목을 다쳤대요.메인촬영은 카메라맨 둘이 맡겠지만, 보조 카메라 한 대를 맡을 사람이 없대서요.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앞장서며 보이는 장면들을 간단하게만 담아주시면 된다고 해요”

“네 그러죠, 제가 이래뵈도 학창시절 방송부 출신입니다.”

“다행이네요, 카메라 조작법은 따로 배우지 않으셔도 되겠군요.”

잠시 뒤 윤선과 태호, 명아, 네빌과 카메라맨 한명과 음향담당 한명으로 구성된 그룹은 차 한잔씩을 나눠 마시며 일종의 발대식을 가지면서 결의를 다졌다.

“미스터 정 오늘 호랑이를 볼 수 있을까요?”네빌이 출발과 동시에 윤성에게 물었다.

“산이 허락한다면요.”

“‘산이 허락한다’라 신비로운 표현이군요. 허허”

네빌은 윤성의 표현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는 듯 보였다.

그들은 이미 두세 차례 촬영을 위해 산에 오르고 48시간 이상 카메라를 설치해 놓았으나 아직 호랑이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군은 마주치기 어려운 만큼 신비한 존재긴 하죠.”

“산군..?그게 뭔가요?”네빌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명아씨, 설명 좀 부탁드릴게요.”

명아는 산군이란 단어의 뜻과 왜 호랑이를 그렇게 부르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산기슭에 다다르자 조금씩 눈발이 약해지는 듯 보였고,그들은 좋은 징조라며 기뻐했다.

“해가 반짝 떴네요, 오늘은 호랑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곧 산군의 영역이니 너무 들뜨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명아가 다소 들뜬 것처럼 보이자 윤성이 조용히 가라앉혔다.

“오늘은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어요.”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던 윤성이 조용히 계곡의 상류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쪽은 처음 가보는 것 같네요.” 윤성의 바로 뒤에서 산탄총을 들고 뒤따르던 태호가 말했다.

윤성이 왜 이쪽으로 왔는지 설명하려던 때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동굴이 나타났다.

계곡가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 아래에 지름이 2미터는 될 듯한 꽤 큰 동굴이 있었다. 사람이 걸어들어가긴 힘들어도 네발짐승이라면 쉽게 드나들 수 있어 보였다.

“네빌씨. 이 동굴 입구에 거치 카메라를 설치해놓으면 뭔가 건질 수 있을 것 같군요.”앞장서던 윤성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동굴 입구에 선명하게 찍힌 고양이과 동물 발 모양의 진흙 자국은 호랑이가 이곳을 지나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카메라만 설치하고 다음에 다시 와서 들어가 보도록 하죠.

무작정 들어가긴 위험해 보이네요.”

“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다음엔 내부 촬영용 특수카메라라도 가지고 와야겠어요.”

그들은 일단 오늘은 물러서기로 결정하고 동굴 입구에 카메라를 설치한 뒤 계곡을 따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자 동굴에서 호랑이가 나와 입구에 놓인 낯선 물체가 신기한지 잠시 살펴보더니 앞발로 툭툭 건드리고는, 입에 넣었다가 먹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바로 뱉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피고 몸을 한번 쭉 늘려 기지개를 편 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일행들이 내려간 방향을 잠시 쳐다보고 나서 다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밤부터 산그늘마을을 포함한 강원도 전역에 갑작스런 폭설주의보가 내렸고, 촬영팀은 강제로 휴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의 흔적을 확인하고 다시 촬영하러 갈 생각에 들떠있던 네빌에게 휴식이란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는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직접 날씨를 확인하거나 일기예보를 찾아보며 보냈다.

그렇게 5일이 지나던 어느 날 오후 서서히 눈발이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저녁에는 완전히 그치고, 하늘엔 보름달이 밝게 떠올랐다.

“내일 낮에도 날씨가 좋다면 한바퀴 돌아보도록 하죠.” 얼른 촬영을 재개하고 싶어하는 네빌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윤성이 먼저 촬영을 제안했다.

윤성은 갑자기 생긴 휴식일동안 할아버지 집의 다락 정리를 시작했다.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정리를 미루고 있던 다락 안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윤성은 그 안에서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사진 속 정 노인은 40대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정 노인의 모습이 아닌 정 노인이 깔고 앉은 사체였다. 미간에 총을 맞은 채 처참하게 죽어 있는 호랑의 시체를 사냥꾼들과 깔고 앉은 채 기념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였다.

윤성은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이 사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아버지, 할아버지 집 다락방에서 사진을 한 장 찾았는데, 좀 충격적이어서요. 메시지로 보낼테니 한번 보세요.”

“에이 예전에 나 어릴 때네, 예전에 할아버지가 약초꾼일 때 사냥꾼들 길안내도 해주고 그랬었어.”

“아아, 전 할아버지가 밀렵꾼이었던 줄 알고 놀라서요.”

“에이, 할아버지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디?”

“당연히 아니죠, 그럴분이 아니었어서깜짝놀라가지구요.”

윤성은 아버지와의 통화 후 가슴을 쓸어내렸다.

윤성이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항상 산을 좋아했고 일종의 경외심마저 느껴질 정도로 산을 대하곤 했다.그런 할아버지가 밀렵꾼이었다는 사실은 윤성에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그 사진이 가져다 준 충격은 매우 컸다.

그 사진은 윤성에게 한 가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그간 동물보호연대의 일원으로 활동은 하였으나 다소 미온적인 면이 있던 그의 마음 속에 열정이란 불을 지폈다.

그는 명아에게 그 사진과 자신이 느낀 충격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로 인해 무언가 정열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 이야기했다.

그녀는 일단 다큐멘터리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치자고 이야기했다.그녀는 그것을 통해 한국 호랑이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보존을 위해 더 힘쓸 수 있으리라 이야기했고, 그것이 자신이 열심히 협력하고 있는 이유라 덧붙혔다.

명아의 이야기를 들은 윤성은 이 간단하지만 당연한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나무라며 마음가짐을 새로했다.

윤성은 무슨 일이라도 해서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그 사진을 잊고 싶었다.

윤성은 괜히 네빌을 찾아가 장난감 자동차처럼 생긴 특수카메라의 조종법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미스터 정, 잘 하네요. 이정도면 당신이 전담해서 촬영해도 되겠어요.”

“우리 속담에 쇠뿔도 단김에 빼란 말이 있어요,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곧 행동으로 옮기란 뜻이죠.그래도 오늘은 출발하긴 늦은 듯 하고 내일 해가 뜨면 바로 가도록 하죠.”

“좋습니다. 내일 그 동굴 촬영을 포함해 무언가라도 찍을 걸 건져야 할텐데 큰일이네요.”

“내일부터는 날씨가 좀 괜찮아진다니까 열심히 돌아다녀 봅시다.”윤성이 네빌에게 걱정말라는 듯 말했다.5

다음날 폭설주의보가 해제되고 실제로도 눈발이 꽤 약해져 다시 촬영을 재개해도 될 것처럼 보였다. 촬영팀은 누가 먼저 얘기한 것도 아닌데 아침 9시경부터 각자 산에 오를 준비를 마치고 모여 있었다.

“다들 일찍 모였네요. 날이 추우니 따뜻한 거 한잔만 마시고 출발합시다.”

태호가 마지막으로 회의실로 들어오며 말했다.그는 방한모자와 귀마개 등 추위에 대한 대비를 완벽히 마친 채였다.

폭설주의보가 해제되자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왔는지 진정한 강원도의 추위가 몰려와 온도계는 영하 2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호랑이 찍으려다 얼어죽겠어요,군생활할때도 이렇게 추울 때 산에 올라간 적은 없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태호가 툴툴대며 말했다.오랜 군생활과 사냥꾼 경험을 통해 산에서의 겨울을 수없이 보낸 태호도 불평할 만큼 그날의 날씨는 많이 추웠고 칼바람이 불어대고 있었다.

“이거라도 챙기세요.” 명아가 핫팩을 한 개씩 나눠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밍기적거리다간 나가기 더 힘들 듯 하니 핫팩이 식기 전에 얼른 다녀옵시다.”윤성이 얼른 출발하자고 이끌듯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

언제나처럼 보조카메라를 든 윤성이 앞장서고, 그 뒤에 태호, 명아, 네빌, 카메라맨 및 음향담당이 순서대로 산길로 들어섰다.비록 살을 에는 듯 추운 날씨였지만, 해가 하늘 높이 떠서 햇빛은 따사로워 그런대로 추위는 참을 만 했다.따뜻한 날씨와 오랜만의 촬영에 들뜬 네빌이 들떴는지 동굴 앞 계곡을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살얼음이 언 계곡에 빠져 넘어지는 바람에 온몸이 다 젖어 일행이 다시 다 하산했다가 다시 올라오는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사고 없이 그들은 무사히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미스터 정, 카메라 조작 잘 하실 수 있겠죠?”네빌은 일행과 헤어져 혼자 베이스캠프에 남으면서도 촬영 걱정이 먼저인 것 같았다. 그는 옷만 갈아입고 다시 길을 나서려 했으나 넘어지며 발목을 삐었는지 혼자 걷기가 힘들어 같이 가면 짐이 될 뿐이라는 윤성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반강제적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다시 길을 출발한 일행은 무탈하게 동굴에 도착하였고, 일단 동굴 바깥에 서서 무릎을 꿇고 앉아 손전등으로 동굴안쪽을 열심히 비추며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5분 가량 열심히 불빛을 비추었으나 안쪽에선 반응은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자,윤성은 등에 메고온 동굴 탐사용 카메라가달린 장비를 입구에 내려놓고 카메라가 비추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화면을 보며 조종기를 손에 잡았다. 카메라가 달린 장난감 자동차같은 그 장치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나아갔다.10여초 가량 직진으로 나아가자 막다른 벽이 나타났다. 윤성은 당황하지 않고 잠시 카메라를 후진시켰다가 오른쪽으로 틀었다.그러자 연결된 굴이 나타났고, 그 굴 속엔 카메라의 불빛으로 인해 밝게 빛나는 안광이 두 개 보였다.그 동물은 달려들지 않고 하악질을 하듯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한번 내뱉는 듯 하더니, 뒷걸음질치며 더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췄다.

윤성은 마치 그 동물에게 해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듯 카메라를 뒤로 물렀다.

그렇게 촬영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려던 윤성은 계곡물을 건너다가 문득 촬영을 잘 부탁한다며 홀로 남은 네빌이 떠올랐고, 그였다면 이 정도의 결과물로는 만족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윤성은 다시 조종기를 손에 잡고 카메라를 움직여 동굴 내부 촬영을 시작했다. 호랑이를 마주쳤던 그 굴을 다시 비췄으나 이번에는 호랑이의 안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호랑이는 바닥에 누워 몸을 웅크리고 낑낑거리고 있었다.

호랑이가 몸에 힘을 주며 살짝 일으키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호랑이의 꼬리 부근에서 검고 누런 털뭉치가 세 덩이 떨어졌다.

윤성은 희귀한 장면을 촬영했다는 기쁨을 소리없는 환호로 작게 표현하고는 얼른 카메라를 회수하며 철수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이 마을회관이 시야에 들어올 만큼 내려왔을 때 그들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마을회관 앞 벤치에 앉아서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네빌의 모습이었다.그는 직접 촬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불안했는지 일행을 발견하자 불편한 걸음걸이로 달려와서는 윤성을 붙잡고 무언가 촬영은 했는지 호랑이는 만났는지 잘 찍었는지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윤성은 잠시 조용히 듣고 있더니,자신 있다는 듯 씩 웃으며카메라를 건네주면서 씩 웃으며 말했다.“얼른 직접 확인해 보시죠.”

“야생호랑이의 출산 장면이라니 정말 놀랍군요!” 네빌은 그 놀라운 장면에 감탄하고, 또 만족스러운지 계속 그 영상을 돌려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윤성은 마침 회관에 있던 이장을 보고 조용히 다가가서 호랑이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산신님이 태어나다니, 경사로구먼.”

“겨울인데 새끼를낳았으니 호랑이의 먹이활동이 힘들거에요.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미뤘던 제사를 지낼 때로구만, 딱 지금인 것 같아.”

“무슨 제사 말씀이세요?”

“오래 전부터 마을사람이 호환을 입으면 지내던 제사야. 진작 지냈어야 하는데 계속 일이 생겨서 못했지.”

다음 날 늦은 오후 마을회관엔 제사상이 차려지고, 앞마당엔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제물로 바칠 돼지 한 마리와 닭 몇 마리는 손질되어 배를 가른 채 놓여 있었다.

먼발치에서 구경하던 윤성에게 이장이 다가와 말했다.

“잠시 뒤에 희생자 가족의 순서 때 부르면 잠시 나오게, 제삿상에 술잔만 올리면 되니 어렵지 않아.”

“미스터 정 이게 무슨 준비에요?”네빌의 질문에 윤성은 이장한테 들은 얘가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호랑이로 인해 인명피해가 났을 때 더 이상 피해가 없게 해 달라고 산신님께 올리는 제사라고 해요.”

네빌은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흥미롭다 생각하며 카메라맨들에게 작은 장면 하나하나도 빠지지 말고 촬영하라 지시했다.

한시간정도 지났을까, 마을회관 앞 마당에 배를 가른 돼지 한 마리와 닭 세 마리를 올린 제사상이 차려졌다. 이장이 대표로 절을 올린 뒤 윤성을 비롯한 호환 희생자들의 가족을 불렀다. 그들은 각각 술 한잔씩을 받아 제삿상에 올렸다.

이장이 축문을 읽는 것으로 제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정육점 사장이 앞으로 나와 제물로 올렸던 돼지 한 마리와 닭 두 마리를 먹기 좋게 손질했다.그 양은 모인 모든 사람이 먹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특별한 반찬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불판에 굽고, 솥에 삶고 하여 양조장에서 제공한 탁주와 맛있게들 먹어댔다.제사에서 이어진 잔치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장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아직 너무 많이들 먹지 말아요.해가 지기 전에 제물을 산신님께 바치러 다녀와야 하니까.”

이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 후 마을사람들에게 주고 남은 돼지 반쪽과 닭 몇 마리를 운반할 수 있게 싣도록 지시했다. 다들 어느정도 준비가 된 듯 하자 이장이 확성기를 들고

산에 오를 준비를 하고 마을회관 앞에 모이라 소리쳤다.

다들 모이자 이장은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었고, 윤성과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아낙네의 남편이 희생자의 위패를 들고 그 바로 뒤를 따랐다.네빌과 명아, 촬영팀이 그 바로 뒤에서 이 진귀한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촬영하였고, 무리의 가장 뒤에는제물을 나르는 청년들이 따라왔다. 태호는 등 뒤로 총을 맨 채 그들을 도우며 후미에서 혹시 모를 위협을 경계했다.

선두가 산기슭에 다다라 산의 어둠에 잠겨갈 즈음 이장을 비롯해 제사의 경험이 있는 노인들이 하나둘씩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마치 산신에게 지금 산에 오르고 있다고 알리는 듯 했다. 하나 둘씩 흥얼거리듯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어느덧 웅장한 합창이 되어 있었고 그 소리는 마치 산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그래서인지 산에 오르는 그 무리는 거대한 짐승이 움직이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산을 올랐을 때 선두의 이장이 걸음을 멈췄다.

이장은 호랑이굴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닭이랑 돼지 가져와!”

청년들로부터 제물용 닭을 넘겨받은 이장은 절벽 아래로 닭을 던지며 돼지 역시 절벽 아래로 던지라고 지시했다.그리고는 절벽 아래 굴 앞에 떨어진 제물들을 바라보며 기도문을 읽기 시작했다. 기도문을 읽기 시작한지 1분쯤 지났을 때 호랑이가 굴에서 나와 제물의 냄새를 맡더니 돼지 뒷다리를 한 입 베어물어 먹기 시작했다. 몇초 지나지 않아 다 삼킨 호랑이는 닭 한 마리를 입에 물고는 사람들이 있는쪽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한 번 숙여 남은 돼지고기를 바라보고는 다시 동굴로 들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먹이를 준 인간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사를 지낸 지 반년 쯤 지난 여름의 어느 날 윤성과 명아, 태호는 네빌의 연락을 받고 다시 한 번 산그늘마을회관에 모였다.

“여러분과 찍은 영상이 워낙 좋아서 다큐멘터리 제작이 매우 수월했습니다. 곧 BBC는 물론 KBS에서도 방영 예정이지만 그 전에 함께 촬영하느라 고생하신 여러분과 마을 사람들께 먼저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미 마을회관 강당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정렬하여 앉아 있었고, 빔프로젝트에는 테스트영상이 상영 중이었다.산의 주인, 산그늘 마을에서]라는 제목이 화면에 나오자 영상을 지켜보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초반에 거치카메라에 찍힌 길잃은 아기 멧돼지의 모습, 제사지내던 날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나오는 장면에선 지켜보던 모두가 웃고 떠들었지만 동굴에 들어가 호랑이를 탐색하는 장면에선 다시 모두가 고요해지더니 새끼호랑이가 탄생하는 장면에선 모두 동시에 환호성을 지르며 감탄하고 있었다. 몇주 뒤 다큐멘터리는 네빌의 말대로 KBS, BBC 등 TV 방송국과 각종 OTT에서 방영되며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게다가 유튜브의 예고편 영상까지 조회수가 1억뷰를 넘기며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고, 단순한 성공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명아는 넓어진 시야 덕인지 국제적인 환경보호 NGO인 바이오스코프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윤성은 한국호랑이 보호의 공로를 인정받아 명아의 뒤를 이어 동물보호연대 대표 자리를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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