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자리에서 다시 걷는다

프롤로그

by Everett Glenn Shin

삶은 언제나 달려가야 한다고 믿었다.
멈추는 순간은 패배이고, 뒤처짐이며, 곧 사라짐이라 여겼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제 발로 멈춰 선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먼저 나를 멈춰 세웠다.
퇴근하고 누워 쉬던 중 손끝에서 힘이 빠져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지고,
다리를 떼려던 순간, 힘없이 주저앉았다.
입술은 열렸으나 목소리는 공기 속으로 스러져 갔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처음으로 세상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갑자기 굳어버린 듯, 내 몸은 나를 떠나 있었고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손님이 되었다.

그렇게 멈춰 선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배웠다.
절망은 고요 속에 숨어 있었고,
고요는 다시 시작할 씨앗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멈춘다는 건 끝이 아니었다.
멈춘 자리에서야 비로소,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이 책은 그 느린 발걸음의 기록이다.
무너짐에서 피어난 희망, 절망 속에 숨어 있던 작은 기도의 이야기.
그리고 오늘도 계속되는, 나의 한 걸음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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