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넉넉함이 주는 감동

by 한정희


“엄마, 나 어제 너무 감동된 일이 있었어.”

둘째 딸의 생일 저녁, 큰딸이 밝은 얼굴로 꺼낸 한마디였다. 요즘 결혼에 대한 고민으로 예민했던 아이가 웃으며 이야기하니, 그 자체로도 기쁨이었다. 그녀가 말한 감동의 사건은 의외로 단순했다. 소개받은 남자와 안양천을 걸은 뒤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시켰는데, 군만두와 탕수육 사이에서 망설이던 순간 그가 망설임 없이 “그럼 둘 다 시키죠”라고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남기면 어떡하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답하며 기꺼이 탕수육과 군만두를 모두 주문해 준 행동이, 딸의 마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뭉클했다. 군만두와 탕수육이 뭐 대단하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집의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다섯 아이와 함께 자라온 우리 집에는 작은 규칙이 있었다. 치킨을 시키면 언제나 딱 한 마리. 각자 몇 조각이 내 몫일지 계산하며 신중히 집어야 했다. 아빠는 튀긴 음식이 몸에 해롭다며 더 시키지 않았고, 아이들은 늘 제한된 몫 안에서 만족을 배워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큰딸에게 “둘 다”라는 선택은 단순한 음식 주문을 넘어선 넉넉함의 경험이었다.


나는 곧장 신혼 초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1980년대 후반, 외식산업이 막 활기를 띠던 시절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피자헛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남편은 “피자보다 장떡이 훨씬 맛있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의 작은 바람은 겉멋으로 치부되었고, 그 말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히 남아 있다. 또 한 번은 미국에서 처음 경험했던 창고형 마트의 즐거움을 한국 코스트코에서 다시 느끼고 싶어 과자와 초콜릿을 카트에 담았을 때였다. 그러나 남편은 그것들을 모조리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의 눈에는 불량식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내 선택을 존중받지 못한 충격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효율과 경제 논리에 따라 ‘하나만 고르는 것’에 익숙했던 남편의 태도는, 합리적이지만 따뜻하지 않았다. 큰딸이 “짜장면과 군만두, 탕수육까지 모두”를 주문해 준 그 순간에 감동한 것은, 어쩌면 나의 지난 경험과도 닮아 있었다. 선택은 늘 제한되어야 한다는 사고 속에서 살아온 아이에게, 남김조차 허용하는 여유는 사랑 그 자체로 다가왔을 것이다.


삶은 흔히 ‘제한된 자본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효율만을 따지는 세계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는 선택을 오답과 정답의 문제로 여기며 망설이고, 실수 없는 답을 찾으려다 결국 ‘선택 장애’라는 이름의 늪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배움과 인생의 과정은 정답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답도 실수도 때로는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


큰딸은 네 명의 동생과 바쁜 엄마, 원칙을 고수하는 아빠 사이에서 자라며 늘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틀려도 괜찮다, 남겨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날의 짜장면, 군만두, 탕수육은 단순한 메뉴가 아니라 딸의 마음을 품어 준 여유와 수용의 상징이었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효율이 조금 떨어지고 합리적이지 않아도, 때로는 두 가지를 다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사랑은 정답을 맞히는 데 있지 않고, 틀릴 수도 있는 선택까지 함께 품어 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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