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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Oct 23. 2015

가짜 찬양을 부르자

찬양, 성가, 노래를 몰라서


성가대 X, 찬양대 O


10여 년 전쯤 '성가대'라는 표현이 사라졌다. 


물론 정식 명칭에서는 사라졌지만 '찬양대'라는 표현보다는 '성가대'라는 표현이 입에 착 달라붙는 탓에  구 명칭이 아직도 많이 불려진다.




명칭이 바뀐 이유는 다음으로 볼 수 있다.


1 '성가대' 명칭은  일본식 

2 '성가'라는 표현은 성경에 없음

3 예배 중에는 포괄적인 '성가'가 아닌 '찬양을 불러야 함.




성가와 찬양의 의미


성가 = 기독교 노래

찬양 = 성가 중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노래




예를 들면, 사람들도 많이 아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든가 베토벤이 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같은 헌금송은 기독교 노래에 속한다. 가사에 찬양보다는 기독교의 기능적 의미가 주가 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같은 노래의 경우는 정확한 찬양의 범주에 속한다.












아무 노래나 찬양이라고 한다.



교제할 때 부르는 노래도, 기독교적 자기 고백도 찬양이라고 한다.


교제할 때 부르는 노래는 기독교 신앙을 담은 노래일 뿐이다. 


그보다 문제인건 '자기 고백적인 노래'를 찬양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이런 류의 감정적인 노래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진 노래


빌립보서 2장 9~11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기도의 맨 마지막에 빼먹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를 붙이는 것도 여기에 있다.



"예수, 죄인, 성령, 하나님 이런 단어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반감을 가질 수도 있어서 '그'나 '그분'으로 바꾸는 거지."


요즘엔 아마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비기독교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도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는 요즘 나오는 많은 노래들에서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주님'이라는 표현이야 성경에서 쓰이니 상관없지만, '예수'가 빠진 '예수'를 위한 노래.


주인공이 빠졌는데 찬양일리가 없다.






예수님이 친구?



예수님을 '친구'라 말하는 찬양들이 꽤나 있다. 

성경도 아니요 오직 근래의 몇 찬양들이 그런 가사로 노래를 부른다.


예수님의 제자 그 누구도 예수님을 '친구'라 부르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구'로 격상시켜 주신것 뿐이다.


심지어 요한복음은 15:14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구로 칭해주는 것과 내가 친구라고 우기는 것은 심각한 차이가 있다.

내가 박수치면서 신나게 부르는 노래가 '친구'를 말해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친구라고 '불러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친구'라 불러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친구가 아니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예수님과 3년을 지내고 부활 후 밧모섬 유배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요한은 요한계시록 1:17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예수 그리스도의 무릎을 배고 누웠던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 후 의 고백이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깔깔대며 노래로 부를 만한 '친구'로 보인다면 고민해봐야 한다.










노래 잘하고 기타만 잘 치는 한량들의 노래, 찬양이 아니다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빠진 노래는 찬양이 아니다. 찬양의 주인공이 없는 노래가 찬양으로 둔갑한다. 여기에는 준비됨 없이 그냥 노래 잘하고 기타 좀 치는 사람들, 좀 더 세게 말한다면 개나 소나 교회의 찬양팀의 리더를 맡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도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청년을 예배의 찬양팀 리더로 세우는 것을 봤다. 노래를 좀 하고 악기를 잘 다룬다 하여 어떤 감동이 있겠는가. 


가사조차 묵상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는 사람들이 요즘에 너무나 많다.



그래도 10여 년 전에 이미 이런 망해버린 찬양사역자들에 쓴소리를 던진 사람이 있었다.










책임지지 못할 노래 부르지 말라


원 베네딕트 선교사님인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수련회에서 돈 모엔 목사님의 '나의 모습 나의 소유'를 부르는 회중에게 이런 이야기를 던졌다.


"지킬 수 없는 찬양은 부르지 말라. 책임져야 한다."


히브리서 4:13은 하나님이 '결산'하신다고 했다.

전도사 5:2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고 말을 적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나 책임지지 못할 찬양의 가사들을 징징대며 부르고 있는가.

그 노래의 가사들이 가진 의미를 알고 있다면, 그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전제한다고 할 때 책임질 자신이 있는가.


따라 부르는 사람이야 군중심리로 따라간다 쳐도, 회중 앞에서 '자신이 선곡한 노래로 인도'하는 리더는 신중히 고민해봐야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대개의 교회에 과연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부르고 있는 노래가 '진짜'라면 '진짜'에 걸맞는 진지함을 갖춰야 한다.









찬양과 노래의 차이


아마 1980년대에 나온 노래일 텐데, 엄밀히 말하면 찬양이라기보다는 찬양에 가까운 자기고백적인 기독교 노래다. 나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감동을 받는 노래지만 교회의 '찬양대'가 예배 때 부르는 경우는 드물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경배의 찬양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찬양과 기독교 노래의 구분법은 

'찬양대'에서 예배 중에 부를 수 있는 노래냐 아니냐로 구분하는 것이다.



송명희 시인의 '나'라는 시를 가지고 최덕신 씨가 곡을 붙인 '나'라는 동명의 노래가 있다. 나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감동받는 노래지만 '찬양대'가 예배 시간에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노래다. 자신의 삶에 대한 가사가 전반부이고 후렴은 그런 삶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를 말하고 있다. 좀 더 양보하더라도 찬양에 가까운 자기고백송이다. 












예배 반주를 하면서 특송과 찬양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찬양과 복음성가-기독교노래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휘자들도 꽤나 많다.


지휘하면서 '찬양'을 고른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경험해봤지만 순수한 '찬양'은 꽤나 많다.

그런데 문제는 꽤 오래전 노래들이 많지, 요즘엔 '제대로 된 찬양'을 구하기 쉽지 않다.




무엇을 위해 기독교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가사는 개판인데 아름다운 멜로디로 승부하려는 집단들도 꽤나 많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노사연의 '만남'을 부르고, 노영심의 '그리움만 쌓이네'를 부르며 눈물을 흘릴것이다.



가짜 찬양으로 자기고백하는 개인적인 노래로 눈물을 짜내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부르느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루하기도 멜로디가 이상하기도 한 찬송가가 몇 백년동안 불리는 이유는 재미가 아니라 진짜에 역점을 두기 때문이었다.








- 힐송이 다 망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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