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비판에는 자격증이라도 필요한가?
기독교에 관한 비판을 올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비판이 아니라 비난으로, 혹은 비하로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카테고리의 첫 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적었다.
기독교 비판은 '성경' 비판이 아니다.
기독교와 성경은 다르다.
'목사는 왜 존경받아야 하나'라는 글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떳떳한 사람만 지적하라는 논리를 적용한다면 그 누구도 문제를 꼬집을 수 없다.
판사, 검사는 떳떳한 인생을 살고 있어서 '존경하는'이라는 대접을 받는 것인가.
목사들은 누구보다 떳떳하고 신권에 가까운 존재들이라 단 위에서 설교를 던지는가??
잘못을 덮어주자, 감싸주자, 기도하자라는 논리가 덮어버린 한국 개신교의 세계에는 '권징'이 없어졌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 강남교회에서 삼일교회로 옮겨 목회를 하고 있는 송태근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다. 권징이 없다. 구약을 보고 신약을 보더라도 잘못에 대한 신앙공동체의 크고 작은 징벌은 존재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걸 잃어버린지 오래됐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덮어버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앞전 글에서도 인용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부적절한 부모들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
'오냐 오냐'
확실한 맺고 끊음이 없으니 아이가 잘못 자란다.
한국 기독교-개신교가 자행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기독교가 성경에 종속된 것이지 성경이 기독교에 종속된 것이 아니다.
잘못된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지 잘하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성장제일주의를 비판하는 것이지 성장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눈치 보는 목회자를 비판하는 것이지 성경적 목회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자가 성경대로 목회 할 때 교회는 성장한다.
강북구 미아에 위치한 강북 제일교회라는 곳이 있다.
강북 지역에서 꽤나 크게 성장한 곳인데 故윤덕수 목사님이 평생 시무하셨다.
활동적인 그분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어쩔 수 없이 일주일 내내 성경 보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기에 강북 제일교회는 두배 성장했다. 교인이 두배 늘었다는 이야기다.
그럼 이름도 빛도 없이 사역하는 시골 목회자들은 뭐가 되는 것이냐는 질문도 있었다.
그래, 아무 대가 없이 시골-오지에서 사역하는 분들도 계신다.
하지만 목회자가 '말씀'으로 씨 뿌리고 거두지 못한다면 성경에 나온 달란트 비유도 부정할 것인가.
중국, 아프리카, 중동에서도 지하교회가 번성했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사역하는 분들도 목회자라면, 목사라면 다른 무엇보다 능력 있는 성령의 말씀을 추구하고 들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교회 부흥의 원천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닌가. 수많은 전도자가 그렇게 했다.
지금이 로마, 일제 시대, 중세시대처럼 가혹한 종교 처벌이 있는 시기도 아니고 특수사역이 아닌데도 무명의 헌신을 인사치레로 추앙하는 건 문제가 있다.
지성이 빼어난 설교, 수준 있는 설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성령이 주는 권능 있는 말씀의 증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와 그곳에 속해있는 주일학교를 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 회개와 심판을 얼마나 얘기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위로만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능력, 보혈, 십자가가 설교 시간에 자주 등장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더불어 21c에 나오고 부르는 찬양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라지고 있는 것만 봐도 한국 기독교 전체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같은 단어를 쓰면 사람들이 자주 부르거나 듣지 않아 아예 그 이름을 뺀 노래를 만든다는 미친 사람들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