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이 Dec 14. 2015

전도사가 떠났다

아무-의미-없이



1년 정도 부서를 맡은 전도사가 떠났다.


여기서 전도사 뒤에 '닙'자를 붙이지 않는 것은 교사를 교사로 의사를 의사로 변호사를 변호사로 부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다.




이제 신대원을 다니는 그가 설교를 가까운 친구에게 들려주니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 젊은 전도사가 근무했던 1년 내내 느꼈던 감상이 친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젊은 전도사는 성격이 참 좋았다.

떠날 때 교사 중 한 사람은 장문의 개인적 편지를 써와서 읽어주기까지 했다.




이 전도사의 설교는 한주가 지나면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친절하고 밝은 모습을 좋아해서 편지를 쓴 사람조차 설교를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격주로 예배에 지각을 하니 이 전도사가 '좋은 성격'을 전파한건지 '복음'을 전파한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이 가당찮은 내용에 앞서 본 회퍼의 사진을 맨 앞에 걸었다.




본 회퍼는 나치에 대항했고 수용소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는 날카롭고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했지만 동시에 온화한 사람이었다.




21c에 본 회퍼는 온화한 사람보다는 '정확한 메시지'를 던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가 기억한다.

본 회퍼에 대해서 배우고 그렇게 살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살기에 본 회퍼의 시대보다 어렵지 않는데도 왜 이 시대에 그와 비슷하게나마 설교를 하고 해야 할 것들을 말하는데 당당한 젊은 전도사는 찾기 어려운 것일까




심지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곳에서조차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들이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물론 성경의 문구와 아픈 사실들에 대해서 지적하며 옳은 것을 얘기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지도와 경고를 말하라 존재하는 전도사, 목회자들이 그런 말을 못한다.


겸손하고 친절한게 사랑에 가까워 보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죽고나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친절하고 숨기만 했던 전도사의 배려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나는 최근 몇 주간 성격 좋고 친절하던 젊은 전도사가 떠난 것에 대해 아이들이 아쉬워하지 않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1주일 조차 버티지 못하는 설교가 보여주는 비극일 뿐이다. 물론 그건 젊은 전도사가 느껴야 할 비극이다.





복음은 기쁘거나 불쾌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다.


정확한 복음은 예리하게 기억에 남는다. 

정확한 복음은 삶을 뒤집을 수 밖에 없는데 잊을 수 없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해 그렇게 주신 복음이 7일도 버티지 못한다면 그건 복음을 담지 않은 설교다.




복음이 없는 설교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예배시간에 나오는 모든 설교가 진짜일까?



사실 두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설교 뿐만 아니라 모든 예배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진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다.


주일에 모여서 찬송가를 부르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읊고 누군가의 설교를 듣는 형식을 예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형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예배의 본질이 모호해지고 있다.


전도사와 목사의 가감된 설교가 '무조건'적인 대접을 받고 있다.

찬양대의 불충분하고 불분명한 노래가 불려지고 있다.







물론 보다 선명한 예배를 위해 충성하는 목회자들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더 큰 교회로 웃으며 떠난 젊은 전도사도 많이 있다.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학생 교사 성도들이 있는데 헤벌쭉 희희낙낙하는 목회자들은 비극이다.


성전 앞 장사치들의 판을 엎은 건 구약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셨다.


성전 앞 장사꾼들이 성전의 제사장들과 더러운 연줄이 없었을리 만무하다.





성도와 교회 제직의 타락은 목회자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교회나 성도나 개인이나 누구나 언제나 부족하다.


하지만 부족한 것을 좋은게 좋은거라 웃으며 넘어가는 것과 나아지기 위해 달음질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교제를 위해 설렁 드려지는 예배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특히 목회자가 입을 닫는 건 직무유기인 동시에 모독이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죄



본 회퍼처럼 목숨걸지 않아도 말 할 수 있고 행동으로 고칠 수 있는 일이다.


넉살 좋은 목회자와 그런 목회자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해야 할 말을 서로 피하는 것은 

사람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죄다.



자기 마음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죄다.






설교하기 위해 4년을 대학다니고 

더 잘 하기 위해 대학원을 나와도 '설교'하지 못하는 목회자가 의외로 많은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번잡한 행사로 꽉 채운 교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