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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Sep 06. 2015

목사는 왜 존경받아야 하나

당신들이 받는 존경은 진짜인가

시신으로 돌아온 손양원 목사와, 그의 가족들, 상주인 남자는 그의 두 아들을 죽였지만 손 목사가 양아들로 받아들인 안재선이다.


※이 글을 처음 쓸 땐 한경직 목사가 왠만하면 잘 한 줄 알았지. 내가 서북청년단 비화를 몰랐다면. 자기가 죄인이지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말은 못 하겠다는 뉘앙스의 한경직 목사는 결국 회개를 실패한 셈이다.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밀양의 그놈과 다를 게 없다.


목회자들 중 좋은 사람은 많다.
하지만 잘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이가 많든 적든 목사, 전도사는 존칭의 대상이다.


목사'님' 혹은 전도사'님'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이라며 그들의 삶은 존경받고 격려받으며 기도의 대상이 된다. 내가 알던 목사와 전도사도 물론 어려운 길을 묵묵히 가기로 가시밭 길을 헤쳐가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들이 받는 존경과 존중의 이유는 현재 그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들은 스스로가 존경의 대상이 못 되고 있다.



20c 중후반 한국교회의 부흥기를 이끈 목회자들이 있다. 기독교는 물론 사회의 영적 스승이 되었던 분들이 있다. 말년에까지 난잡한 사건들, 흙탕물에 자신을 던지지 않은 유명한 두 분을 꼽자면 한경지, 옥한흠 목사님 두 분이다.



충무로에 있는 거대 교회인 영락교회를 개척한 한경직 목사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4대 일간지 기사는 물론 KBS에서는 그의 삶을 조명하는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옥한흠 목사님은 현재는 오정현 목사가 담임으로 있고 논란으로 휘몰아치고 있는 사랑의 교회를 개척했다.



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학을 했던 사람들이다.

자신의 굶주림보다 이웃의 굶주림을 돌봤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며 교회를 성장시켰고 희생했다.



그런데 오늘의 목회자들, 목회자를 꿈꾸는 신학생들은 어떠한가.



나는 '목숨'을 건 '열정'을 보여주는 목사, 전도사를 본 지 아주아주 오래됐다.






스펙과 인맥



특히 대학, 대학원을 다니는 전도사들 대부분의 관심사는 사례금, 장학금, 수도권에 있다.

사례금을 많이 주거나, 장학금 여부나, 수도권 유명 교회에 관심이 있다.

성경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스펙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신념 있는 사람들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역이라는 거창한 신학적 성경적 표현보다는 직업에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다.


일정 신학대 이상이 아니면 뽑지 않는다.

(장로회 통합 측의 예를 들자면)

장신대, 장신대 대학원이 그들이 사랑하는 학벌이다.


목회자들은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을 비난하는 설교를 하지만 교회의 속사정을 한 번씩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들이라면 알 만한 사실이 있다. 목회자의 인선은 대부분 인맥과 학연, 지연을 통해 이루어진다.


담임 목회자가 바뀌면 부목사과 꽤 많은 전도사가 바뀐다.

사례비가 나오는 찬양대 지휘자, 반주자(피아노, 오르간)가 바뀐다.


우연하게 교회에 자리가 나오면 형식상 이력서를 받는다 해도 결국 자신이 인증하는 사람을 뽑는다.


좋은 사람이 되려니 성경에서 좋은 말만 뽑는다. 그런 좋은 사람이 잘 하던가.









정치를 칭찬만 하는 목회자



미국의 존파이퍼 목사를 보라. 존 맥아더 목사를 보라.


그들은 사회의 비난을 들을지언정 성경이 무엇이 옳다고 얘기하는지,

정치인이, 대통령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꾸준히 강력하게 지적한다.



교회 나오는 국회의원, 장관, 기업인들을 사랑하는 목회자들이 이끄는 교회들 덕에 한국교회는 더 이상 사회 비판기능을 상실했다. 자정기능 조차 없는데 누굴 꾸짖겠냐만은...


국회의원이 되면 장로가 된다.

돈이 많으면 장로가 된다.


그런 씨앗을 누가 처음에 뿌린 것이겠는가.

아... 한국에서 난다긴다 하는 유명한 교회들을 보라.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성장에 대한 참 좋은 변명



스펙을 쌓아야 하니 좋은 사람이 돼야 하고,

인맥을 만들어야 하니 좋은 사람이 된다.


그런 목회자들이 득실거리니 성장이 없다. 교회는 사람들의 모이는 곳이 사람들의 수가 그 수준과 분위기를 계량하는 척도가 된다. 사람들의 수가 줄어드는 교회가 그렇지 않은 교회보다 많은 요즘인데 이상하게도 그러할지언정 목회자들이 책임을 지거나 탓을 듣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한 데는 참 좋은 변명이 있는데.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이 중요하다."


참으로 개소리다.  그런 변명하는 교회에서는 질적 성장도 보통 없다. 이 곳이 기독교가 자생하기 어려운 이슬람 국가라면 이해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탄압이 있는 지역에서조차 지하교회의 규모가 늘어난다.


질적 성장 없는 양적 성장은 있어도 양적 성장 없는 질적 성장은 없다.


질적 성장에는 양적 성장이 필히 동반된다. 그건 사도행전 2:47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가시적이다. 질적 성장에 따른 양적 성장은 그리 큰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교회의 체계상 목회자의 계획과 지도는 평신도 봉사자들에게는 일종의 '도그마'다.

능력 없는 사람만 좋은 목회자가 날로 늘어나니 능력 없는 리더도 함께 늘어났다.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




교회에서 얼마 전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장학금을 지급했다. 교회의 장학금은 그 집단의 특성상 성적보다는 경제 수준에 따른 '구제'의 성격이 짙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여. 마태복음 6:3


부서의 부장집사와 전도사, 위원회의 담당 목사, 그리고 장로가 모여 회의를 해서 대예배 때 대상자 모두를 일일이 호명하여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했다.


신학을 전문적으로 배운 6명의 목회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결정을 했다. 성도의 헌금으로 하는 일종의 구제사업을 예배 때 대대적으로 홍보했고, '형편이 어렵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명했다.



단적인 예이지만 성경대로 살라고 했지만 그들은 성경대로 결정하지 않았다. 성경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그런 결정을 할 때 어떠한 분노도 갈등도 진동도 회의에서 없었다. 혹시 마태복음 말씀이 너무 하찮아서였나?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인자는 누울 곳이 없다 하신 예수님 말씀과 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 신축 사랑의 교회다. 이 신축을 할 때 당시 은퇴한 故옥한흠 목사는 상당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지만 사랑의 교회는 신축을 했고 쇼핑몰 같은 교회를 만들었다.


신축비용 3,000억 원. 오늘날 교회의 구제는 사람이 아닌 건물에 들어간다. 그래서 망하는 교회도 많다. 건축하다 망하는 교회가 참 많다.




우상, 성화 등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부정하신 것들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 얼마나 많은 캐릭터들과 예수님 성화들이 존재하는가.

목회자들이 말씀대로 거절했다면 응당 존재하지 못했을 것들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글자의 종교인 기독교에서 그림과 영상에 매몰되어 간다. 그리고 그 선두에 예배 때 영상과 이미지를 아주 아름답게 활용하고 그것들로 감동을 주려 노력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심지어 가수나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기도 한다.


초대교회에서 화려함과 기교가 성장에 이용되었는가?

그들의 부흥에 사용되었던가?

유력자들이 있어서 그 교회가 성장했다고 하는 고백이 성경에 나오는가?


아. 니. 다.


그런데 그 활용의 선두에 목회자들이 있다. 꺼져라.







세금도 안 낸다.



세상이 세금을 내라 요구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마태복음 22:21


이중납세라는 궤변은 꺼져라.

돈은 돌면서 세금을 남긴다.

개신교 교회는 천주교에서 자진 납세하는 세금을 왜 내지 않는가.


그것도 목회자들의  주도하에......


예수님의 저 말씀에 예외가 있는가?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 조차도 세상의 권위에 대한 인정을 말씀하신다.



간혹 교회 재정이 힘들어진다는 궤변을 듣는다.


돈에 의해  좌지우지될 만한 교회라면 없어져도 괜찮다는 반증 밖에 되지 않는다.







자정이 안 되는 개신교 집단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지극히 전통적이면서 옳은 격언이 있다.


교회를 통해 성도들을 성장시키고 성경의 옳은 것을 가르쳐야 하는 목회자들의 현 실태다.

그리고 이런 목회자들이 설교 강단에 설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목사'라면 앞뒤 안 가리고 존경했던 구시대적 신자들의 태도다.


"목사님이 말했으니까 맞겠지."







목사님이 말씀했으니 맞으니, 우리 모두 팬티를 벗자.








목사님들, 예수님 잘 믿으세요



영락교회에서 은퇴한 후 한경직 목사는 후임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있는 영락교회 기도원의 18평 건물로 들어갔다.


목사인 사위와 아들은 영락교회와 관련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고, 남한산성으로 그를 찾아온 후배 목사들이 덕담을 해달라니 이 말을 하셨다. 예수님 잘 믿으라고.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 상(상금 102만 달러)'을 1992년에 수상했다.

63 빌딩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소감으로 이 말을 던졌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 참배를 했습니다."


신사 참배의 부끄러움을 평생 간직하며 산 그는 월급을 가난한 이에게 줬고, 영락교회 성도가 선물한 양복과 구두는 늘 교회 앞 거지가 입고 있었다고 했다.




안락한 교회 지붕 아래서 열정도 절박함도 권징에 대한 책임감도 못 느끼는 목회자들이 선배 목회자들의 희생으로 일궈논 고고한 존중의 자리를 훔치고 있다.





웃을 줄만 알며, 인맥을 사랑하고, 스펙을 쌓고, 성도들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설교를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귀에 단 성경만 읊어대는 목회자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물론 그런 이들을 목회자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알만한 사람은 아는 21C에 현존하는 교회 부흥을 증명하는 교회가 분당 지역에 두군데 있다.


이찬수, 김양재 목사님 설교를 가끔 들으며 좋은 사람이 아닌 성경으로 잘하는 목회자가 어떤 사람인지 보게 된다. 이 분들의 설교에 따뜻한 사랑만 존재하지 않는다. 책망과 고난과 회개를 강조하다 못해 강요하고 솔직하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같은 프로를 보면 그저 오냐오냐 하는 부모는 답답하다 못해 자격미달을 느끼게 한다. 자격미달...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과 무엇이 다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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