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최대의 효율 존재의 최소화
인사고과, 평가, 평점은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아무개가 회사가 요구하는 기능을 잘 발휘하고 있는지가 하나
아무개가 관계하는 사람으로서 호의적인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 다른 하나이다.
업무 성취도와 괜찮은 사람인지를 물어보는 여러 질문과 나열되어있는 측정지표들.
(사실 이 두부분은 따로 평가되어야 한다. 한사람을 평가하는데 이 두가지를 한장-하나의 화면에서 주욱 보는 것은 업무성과의 호불호가 인간성에 의미있게 작용할 수 있고, 관계의 호불호도 분명 그러할 수 있으니까)
사람이 좋은 것과 일을 잘하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다. 물론 둘 모두 잘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둘다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결국 경우의 수는 네가지. AA, Aa, aA, aa.
기능하는 인간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전산화와 기계화. 자동공정은 비교적 단순한 업무에서부터 사람의 일거리와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경쟁우위를 점하기 위해 우수한 인재를 선별하는 작업에서 하나의 평가척도인 '기능'을 보다 효율적이고 불만도 없는 기계와 컴퓨터가 가져가고 있다. 인공지능이 문학(일본)과 퀴즈쇼(인텔), 바둑(알파고)에까지 역량을 확장하면서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기능하는 인간이 설 자리는 계속해서 줄어들 것이다.
복합적 사고가 보다 발전된다면 회계, 증권, 금융은 물론 평가업무, 마케팅, 분석에 이어 법조인의 자리까지 가져 갈 것이다. 기능의 최정점에 선 기계는 청탁도 뇌물도 인간관계에 따른 불합리한 결과를 선택하지도 않을테니까. 그리고 이런 효율성과 청렴함(?!)은 자동화와 기계화를 사회와 주주들과 기업의 고객들을 홍보하는 수단을 아주 용이한 장점이 됨은 물론이다.
아마 지금도 상용화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기계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중간에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관리자'로서의 역할만 하면 된다. 이런 일은 금융권에선 이미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능하는 인간은 기계로 대체되고 몇 사람만 결정하는 인간으로 존재하면 된다. 지배구조의 정점에 인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전통적 지배구조와 다르지 않다. 피라미드의 하부구조만 사람에서 기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능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라면.
- 아마도 용이한 해고의 방법을 찾는 대기업은 많은 부분에서 전산화와 자동화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로비를 받는 정치인들은 결국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생각은 하고 있을까?
존재하는 사람은 대체 불가하다. 이를테면 '자녀'라는 카테고리에는 인구 전체가 포함되지만 아무개씨의 자녀는 한명이 됐든 열명이 됐든 그들이 전부다. 친구 아무개씨도 존재하는 사람이다. <A.I>에서 할리조엘 오스먼트가 대체자녀가 됐지만 결국 존재로서의 대체는 실패했다. 그가 버려진 것은 그의 역할이 기능이지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주인공인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이 가장 바랐던 '사랑'을 포함한 감정이 존재하는 인간을 증명해준다. 기계화와 자동화가 절대 줄 수 없는 만족감이 바로 거기에 있다. 자신의 존재. 대체불가능한 존재.
효율과 완벽(完璧)에 둘러싸여서 인간성을 잃어버린 이야기는 영화나 소설, 드라마로 이미 여러차례 사회에 강한 경고메세지를 던져왔다. 심지어 우리가 자주쓰는 완벽(完璧)이라는 단어도 기계나 인공지능이 만들 수 없는 실제이야기, 중국 고사에서 유래했다. 흠없는 옥.
요즘 이런 말을 자주 쓴다지.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 많아."
우린 모두 사람인데 서로를 지나치게 도구화한다. 타인을 기능하는 인간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은 그 자신도 '기능'만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 스스로를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래의 많은 자살 사건들이 존재가 아닌 기능상실에서 비롯된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기능상실이 존재상실보다 더 크게 사람들을 나락으로 끌어들인다. 성적이 나빠서, 시험에 떨어져서, 직장을 잃어서, 돈이 없어서... 이런 비극의 실현은 갈수록 어린 나이의 존재들에게 번져왔다. 어쩌면 우리의 존재를 이미 잃어버린것인지도 모른다. 모두가 기능을 외치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능이란 닳게 마련이다. 기능은 사라진다. 마모되고 퇴화한다. 그러기에 순환하는 인류의 삶이 존재할 수 있고 후대라는 이름에게 존재를 물려줄 수 있었다. 효율적이고 정확한 의사결정의 기능마저 사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게 되지 않을까. 많은 안전장치와 법적 울타리를 친다 하더라도 자동화와 효율을 향한 자본주의의 끝없는 욕심을 막을 수 있을까. 과학의 발전이 내 때에 급격하게 이뤄진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그리고 나 이후의 탄생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이다.
내 세대가 낳는 아이들은 더욱 심한 고용절벽을 맞게 될 것이고 그런 비극을 줄이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동화나 기계화가 아닌 사람을 줄일 것이다. 비관적인 결론일 수 있지만 이미 진행중이다.
최대의 효율은 결국 존재의 최소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균형이 필요하다. 사실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