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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Apr 24. 2016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
『게걸음으로』

215, 16-57, 귄터 그라스, 민음사

p12
…아니면 시간을 비스듬하게 가로지르면서, 마치 뒷걸음질하며 옆으로 비켜 가는 듯하지만 사실은 상당히 신속하게 전진하는 게걸음과도 유사하게 서술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가 1945년 1월 발트해에서 침몰한다.  적게는 6600명, 많게는 10000명이 죽었으리라 추측되는 침몰사고. 마리네스코 함장이 이끄는 S13이라는 러시아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가 그 원인이다.


수천명, 심지어 여자와 아이들이 사망자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이 거대한 죽음은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라는 이름 앞에서 침묵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작가의 말이다.



파울이라는 가상의 인물은 1945년 1월 구스틀로프 호에서 태어나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간다. 파울은 그(귄터 그라스)의 의뢰에 따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게가 걸어가듯이 조사하고 찾아보고 서술한다.


<게걸음으로>


이 책은 문학의 힘, 문학의 목적,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주 잘 설명해준다. 
적어도 나에게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역사 앞에서 어떻게 밝히는지를 꼼꼼하게 둘러치면서 말하고 있다. 마치 게가 옆걸음으로 빙글빙글 돌며 결국 중심에 도착하듯이. 어느 하나도 빼먹지 않고 촘촘하게 집게로 누르듯이.

아래의 소용돌이를 옆걸음으로 돌면서 중심에 도착한다. 어느 하나에도 소홀함없이.







p41
'구스틀로프호'와 그 저주받을 이야기는 전 독일을 통틀어 수십 년 동안 금기사항이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특급 우편으로 내 귀에 그 사건을 들려주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p157
그 불운한 배에 승선한 4000명이 훨씬 넘는 젖먹이, 어린아이, 소년소녀 들 중에서 채 100명도 구출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을 찍은 사진은 우연히 발견될 뿐이었다. 

p181
그렇다, 어뢰정이 아니라 저주받은, 순교자 이름을 따 명명된, 진수대에서 출범한, 한때 흰색으로 빛나고 사랑받았던, 카데에프 휴양단을 실어 날랏던, 계급을 초울한, 세 번이나 저주받은, 승선 인원을 초과하여 태운, 전쟁에 시달린, 어뢰에 명중된, 끊임없이 가라앉고 있는 배의 선상 비스듬하게 기운 침상에서, 머리부터 먼저 나오며, 나는 태어났다.




구스틀로프 호는 다비드라는 유대인 청년에 의해 암살된 나치의 관리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순교자. 배의 이름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해 나(화자,파울)의 엄마 툴라가 배에 어떻게 탔고 내가 어떻게 태어났으며 극우성향을 갖는 아들 콘라트의 재판까지 이르른다. 


배를 만든 나치와 배 그 자체에 담긴 패전의 운명. 나치-히틀러와 함께 마리네스코에 의해 침몰해버린 순교자의 이름을 딴 배. 배에서 생존하고 태어난 사람들과 후손의 이야기.

배(구스틀로프와 다비드) - 배를 침몰시킨 마리네스코 - 툴라&나&콘라트


소용돌이로 설명한다면, 이 세개의 세계가 원의 1/3씩,(120도)의 지분을 갖고 '내'가 게걸음으로 돌면서 반복해가며 이르는 길. 

표지의 '게' 그림은 귄터 그라스가 직접 그린 것이다.



사실 읽기 매우 힘들었다. 아마 2주 정도 걸렸을거다. 마치 책의 제목처럼 게걸음으로 돌아돌아 온것같다. 마지막 80쪽을 읽는데는 두시간이 걸렸다. 읽는 중간에 세월호 2주기가 있었던것도 하나의 이유였을지 모른다. 

정치적 상황, 사망자 등 여러 원인이 다르지만 비극적인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게걸음으로 하나하나 세심하게 들여다봐야 할것만 같다. 아마 그래야 할것이다. 모든 것을 집게발로 총총 짚어내면서 말이다. 



p227
"우리가 그 애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걸 너무 빨리 중단해 버린 게 아닐까요."


마지막 콘라트와 피해학생의 부모들이 나누는 대화인데, 묘하게 나치에 대한 독일국민, 정치인들에 대한 투표권자들에게 던지는 메세지 같았다. 너무 빨리 중단해 버려 발생한 비극.





p279(작품해설)
러시아에서 온 역자가 이 책 제목과 관련하여 물었다. "게걸음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지요." 그라스가 두 손으로 게처럼 기어가는 시늉을 하며 답변했다. "역사적인 사건을 단선적으로 진술한다면 그건 문학이 아니지요. 그 역사의 피와 살을 채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개인과 가족 이야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돌아가지만 결국 전체적으로는 앞으로 나아가는 서술 형식을 비유적으로 게걸음이라고 부른 겁니다."

"…과거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결국 슬픔을 이기기 위한 노력을 다하는 것이지요."





노벨상까지 받은 귄터 그라스에게 병주고 약주고 하던 독일 평론가 라니츠키마저도 이 책에 찬사를 보냈다. 라니츠키는 독일인이 아닌 폴란드인으로 나치에게 가족을 잃었다. 이 소설의 소재인 구스틀로프호 침몰을 통해 그라스가 결코 정치적 변명을 하려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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