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명 은행나무 선한이웃 한국소설
이번 소설은 드라마 보다는 영화에 더 잘 어울릴 듯 하다.
그리스 신화의 엘렉트라는 어미인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다. 그리고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누군가의 딸이자 동시에 엘렉트라이며 엘렉트라 또한 또 다른 엘렉트라에게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되는 끊임없는 회귀와 반복의 대상이 된다.
이정명 작가는 이 모티브를 안기부 요원인 김기준과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이태주의 관계에 덧씌움으로써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을 시대의 거울로 삼고 있다.
소설은 등장인물 한명 한명을 소재로 연작 형식을 띄고 있다. 처음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보다는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에 더 가깝다.
군사 독재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검열과 상호 기만을 통해 체제를 보호한다. 끊임없는 가학적 통제는 스스로의 불안과 취약성을 반증한다. 이런 신경증은 집착이 되어 쫓는 자인 기준이 태주에의 완벽주의를 달성하게 만들고 어느 순간 기준은 태주의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엘렉트라는 소설 속에서 주요하게 작용하는 태주가 쓰는 희곡의 소재로 이런 반복적이고 동일시되는 관계는 1987년과 2017년의 시대관계에도 적용된다. 돌고 도는 역사의 흐름앞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내뱉는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의 충고와 질문이 들리는 듯하다.
80년대 민주화 시위의 영웅인 최민석은 어디에 있고 역사의 망령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공작의 희생양인가 가해자인가. 어느 편에 서 있었는가.
공작을 조종하고 기획한 관리관이나 결말에서 성공한 아무개같은 기회주의자를 우리는 구별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정말 선한 이웃이라서 잔존하는게 맞을까?
제목을 보며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떠올랐고 동시에 이에서 모티브를 따 역설한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생각났는데, 이 제목이 내포하는 함의는 악의나 음흉한 저의를 갖고 도와주는 사마리아인을 넘어 회귀하고 모호한 세상에서 그(혹은 그녀)가 우리를 위한 진짜 선한 이웃이 맞는지를 묻는 뉘앙스까지 풍긴다.
덧붙여 여배우 김진아가 기준과 태주 모두의 대상(혹은 도구)가 된다는 점에 호불호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녀만이 엘렉트라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로 회귀할 수 있는 배역으로서의 구심점이라는 것. 여성만이 스스로 회귀의 원리를 잉태하고 전환할 수 있는 근원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그녀는 연극의 재상영과 두 역 모두를 실현시켜 기준과 태주 둘의 관계를 오롯이 완성하니까.
근데 표지 디자인은 별로다.
<7년의 밤>과 디자이너가 겹치던데...
출판사가 좀 개선했으면 좋겠다.
전면 후면을 이어 연속하는 띠나 형체를 그렸다면 주제에 더 어울렸겠거니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