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등
책등을 좋아한다.
아마도 그래서 아직까지 전자책 하나없이 종이책만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등을 손으로 쥐어보면 그 책의 고유한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두꺼운 책은 두꺼운 대로, 얇은 책은 얇은 대로
자기만의 맵시를 드러낸다.
종이책이 전자책과 구별되는 단 한가지 차이가 있다면 책등이다.
실물과 비실물의 물리적 차이라면 여러가지 있겠지만
책등은 그런 여러 차이를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상징이다.
책의 두께, 높이는 물론이거니와
책의 제목, 저자, 출판사를 담고 있으며,
도서관에서도 책등의 가장 아랫부분에 책의 분류 번호를 기록한다.
책의 자기소개가 오롯이 이 책등에 새겨져 있다.
책의 모든 면이 책등에 연결되어 있다.
어느 곳을 펼쳐도 책등에서 펼쳐지고
한 장 한 장 넘기다보면 언젠가는
하나의 책을 완전하게 쌓게 된다.
하나의 책이 전하고자 하는 지식, 이야기, 성품은
그렇게 쌓여서 독자에게 스며든다.
두꺼운 책일수록
책등을 쌓는 과정을 지나
그 정상에 도달하는 성취감과 기쁨이 배가된다.
100쪽 짜리 책 10권 보다
한 손 가득 꽉차게 묵직한 책 한권을 읽었을 때의 기분.
그렇게 묵직한 한권 한권으로 이루어진
10권, 20권이 넘는 대하소설이나
누군가의 전집을 끝마쳤을 때
한줄로 주욱 나열된 책등은 사유의 물결이 되고
시선은 쌓인 책등의 높이를 디딤돌 삼아
더 높은 곳을 오르게 되는 것만 같다.
두껍고 많은 책이
진리의 양을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는 아니겠지만
책이 책을 풍요롭게 하고
독서가 독서를 풍요롭게 하는
그 세계의 경계에 발을 슬며시 디디었더니
그 어떤 책등도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