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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이 May 17. 2018

105 『캄포 산토』 - W. G. 제발트

『캄포 산토』 - W. G. 제발트,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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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 영혼의 고통을 뼈아프게 감지해 질식할 것 같은 발작에 가깝게 표현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상연하는 고통을 지켜볼 관중을 교활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미학적 변조를 염두에 두고 능청스럽게 조종하는 것 사이를 오가는 일은, 문명의 모든 단계를 통틀어서 분명 당혹스럽고 그 자체로 혼란스럽게 변모한 우리 인류의 더없이 특기할 만한 특징이다.

기억과 폐허의 문학을 이뤄냈다는 제발트의 이 유고집은 읽는 내내 거인의 어깨에 올라간 기분을 만끽하게 해준다.

재로 뒤덮힌 역사의 폐허에서 짚어내는 각 지점마다 그의 폭넓고 깊은 지식과 가만하지만 웅장하고 치열하게 다듬은 사고의 과정이 드러난다.

자신의 문학이 바라는 푯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가들이 있는데 제발트는 그 모범을 보여주는 듯 하다. 이 책의 열 여덢 편의 작품은 작가 생애 전체에서 무작위로 뽑힌 듯 스펙트럼이 넓지만 한 지점으로 모인다.

뭐라고 더 중언부언 하기 보다는, 출판사에서는 싫어하겠으나 작가의 목소리를 빌려오는 것이 이 책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훨씬 좋은 방법이리라 생각한다.

p100 - 기억이 위험한 이유는 기억을 고집하며 사는 사람은 망각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기 때문이다.

p182 - 글쓰기는 미심쩍은 사압이요 손쉬운 먹잇감이다. 하지만 저 바깥에 실재하는 세계의 압도적인 힘을 생각하면, 글쓰긴를 중단하는 것보다는 무의미를 향해가더라도 계속하는 것이 낫다.

p224 - 오늘날 1950년대부터 쏟아져나온 카프카 연구서 가운데 아무 책이나 한 권을 펼쳐보면, 실존주의며 신학이며 정신분석이며 구조주의며 탈구조주의며 수용미학이며 시스템비판에 영감을 받은 이차문헌들에 얼마나 많은 먼지와 곰팡이가 앉았는지, 면면이 얼마나 지리멸렬한 헛소리를 반복하는지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그중에는 그렇지 않은 책들도 있다.

내일은 518이며 21세기를 디디고 나온 한강 작 #소년이온다 , 김숨 작 #한명 이나, 시대를 건너와사 다시 발광하는 현기영 작 #순이삼촌 같은 책들이 폐허를 기억하고 고통에서 피어나는 시대적 명령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제발트의 이 산문집은 그 명령이 문학의 옷을 입는 정당성을 사변한다.

p287 -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

p176 - 박해받은 피해자의 경우에는 시간의 통시적인 끈이 끊어져버린다. 배경과 전경이 마구 뒤섞이고 실존을 보증하는 논리적인 안전장치가 중단된다. 공포경험은 인간의 가장 추상적인 고향인 시간에도 전치를 일으킨다. 유일한 고정점은 선명한 고통의 기억과 이미지로 되풀이되는 트라우마적 장면뿐이다. 장 아메리는... (후략)

그렇다.

통시적인 끈이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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