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내입장에서) 고조할아버지 내외, 증조할아버지 내외, 할아버지 내외분의 묘를 자그마한 산을 하나 사서 함께 모셨다.
그리고 그곳은 매년 명절이면 아버지와 나, 작은아버지와 그 아들 둘 즉 남자 다섯이 부지런히 다니며 벌초를 했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작은 사촌형은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작은 아버지도 기력이 예전만 못하시니 결국 나와 큰 사촌형만 남게 되었다.
성인 남자 둘이 낫이며 톱을 들고 아침 일찍 시작하면 점심 전에는 해치울 수 있는 그 정도 일거리였다.
매년 예초기를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또 벌초를 마치고 나면 그다음 벌초는 1년 뒤니 내년에 생각하지 하는 생각으로 미뤄두었다.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달라졌다.
믿고 있었던 사촌형의 근무여건상 벌초날짜를 맞출 수 없게 된 것이다.
나 혼자 벌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1. 나는 이제 타 지역에 살고 있으니 짐을 바리바리 챙겨서 전날 어머니집으로 내려간다.
2. 저녁에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까? 아니다 술을 마시면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일하기가 곤란하다. 기각
3.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산으로 이동한다.
4. 낫으로 풀을 베고 톱으로 주변 나무를 정리한다.
5. 성인 남자 둘이 했을 때 점심 전이었는데 나 혼자 하면 점심은? 더위는? 한낮에는 어딘가에 피해있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제 미루고 미뤄뒀던 예초기를 사야 할 때다.
인터넷을 열고 예초기를 검색했다.
성능이 좋기는 가솔린 예초기가 가장 좋지만, 1년에 한 번 쓸까말까인데 맞지 않다. 그리고 파워풀한 회전력도 무서웠다.
전기예초기 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저렴이 쪽으로 관심이 갔지만 일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다시 4번과 5번의 반복이다.
돈을 좀 더 주더라도 쓸만한 물건을 골라야 한다.
전기예초기를 골랐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안전장비도 필요하다.
1. 얼굴을 가려주는 투명 아크릴이 달린 모자
2. 장갑
3. 긴팔옷
4. 긴 바지
5. 두툼한 앞치마
6. 두툼한 장화
낫과 톱도 여전히 필요하다.
해놓고 보니 부족한 것
1. 낫이 부서졌다. 새로운 튼튼한 낫
2. 낫을 살려고 하니 마체테 칼과 1+1으로 팔길래 마체테 칼도 사버렸다. 작업은 장비빨이다.
3. 예초기로 갈아버린 풀은 낫으로 벤 것처럼 집어지지가 않는다 모아서 버릴 갈퀴
- 이제 왜 전문가들이 강풍기로 밀어버리는지 알겠다
최첨단 기계의 힘을 제대로 느꼈다.
전기예초기는 나 혼자서 2시간 만에 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줬다.
물론 팔이며 어깨며 허리며 몸살을 피해가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미션은 클리어했다.
이제 혼자서도 벌초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를 그곳에 모셔놓은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이니 별수 없다.
이제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이렇게 2025년 추석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