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드디어 우리 부부에게도 축복이 찾아왔다.
첫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산부인과에 가서 임신사실을 확인하고
기쁜 소식을 양가 부모님께 알려드렸다.
한 달 정도 뒤 추석에
작은아버지께서 우리 집에 방문하셨고
나는 작은 아버지에게도
이 소식을 말씀드렸다.
작은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오~ 정말 좋은 일이구나. 그런데 아들이야? 딸이야?
아직은 모르는 건가?"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16주쯤 지나서 초음파 검사를 할 때쯤
힌트정도로만 알려주던 때였다.
아들이면 초음파에서 뭔가 보이네요, 초음파 사진만 봐도 씩씩해 보이죠?
딸이면 예쁜 아이네요 핑크가 잘 어울리겠어요 정도...
그래서 나는 작은아버지에게
'아직은 잘 모르고 16주쯤 병원에 가면 알려줄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말씀드리려는 찰나....
갑자기 아버지의 황급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아니 그런 걸 왜 물어... 아들이면 뭐 하고 딸이면 뭐 하려고'
작은아버지는 당황하며 대답하셨다.
'아니 뭐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요, 아들이든 딸이든 다 축하하는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죠.'
작은아버지는 멋쩍게 대답하셨다.
아버지는 바로 순간의 찰나도 없이 대꾸하셨다.
'아니 그런 건 궁금해할 필요도 없네, 그런 건 물을 필요가 없어.'
당시에는 마치 그런 말이 아이에게 들리면
아이가 너무 속상해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뉘앙스로 들렸다.
하지만 이런 뉘앙스는 내가 아는 아버지 입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4 자매를 낳고도 아들을 낳고 싶어서 5번째 아이를 낳으신 분이 아닌가?
(그 덕에 내가 햇빛을 보고 살고 있다)
아들이 태어났다고 머리도 못 가누는 아이를 자전거에 태울생각에
누나들은 한 번도 안태워준 자전거에 보조의자부터 설치하신 분이 아닌가?
딸들은 한 번도 손잡고 저녁산책을 안 나갔으면서
아들은 부지런히 저녁 만화영화도 못 보게 하고 산책을 다니며
'우리 막둥이'라고 자랑하신 분이 아니신가?
주말마다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과자를 맘껏 사라고
뒷짐 지고 슈퍼 문 앞에 서계셨던 분이 아니신가?
나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눈을 돌려 와이프를 쳐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와이프는 내 표정의 의미를 잘 몰랐을 수도 있다.
어쨌든 작은 아버지는
'거 참 형님도 유난이시네요.'라면서 물러서셨다.
몇 주 후 임신 16주 차가 되었을 때 우리 부부는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모니터를 이리저리 유심히 보시더니
'저기 뭐가 보이네요, 잘 보이죠?'라면서 모니터의 한 점을 가리켰다.
까만 모니터에 하얀 점들의 연속에서
뭐가 잘 보인다는 건지 솔직히 알 수가 없었지만
의사 선생님이 '희미하게 보이네요'도 아니고 '잘 보인다'라고 하는데야
'네 잘 보여요'라고 할 수밖에.....
나는 진찰실을 나와서 아버지에게 바로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산부인과에 왔는데 아들이라고 하네요"
나는 아버지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기대했지만 의외로 아버지는 담담했다.
몇 주 전 작은 아버지와 대화가 떠오르면서
'혹시 아버지는 나의 2세를 응원하면서 아들이던 딸이던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그런 마음이 진심이었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장난기 어린 마음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들이라 기쁘시죠?"
"아니,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응? 알고 있었어 가 무슨 뜻일까?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산부인과에 아버지가 와 계신 건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이를 가진 부부들이 혼잡스럽게 모여있는 대형 산부인과 병원 복도에 아버지 모습은 안보였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행동이다. 나는 지금 아버지 집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통화 중인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는 뜬금없는 아버지의 말씀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아버지의 대답은 정말 놀라웠다.
"나는 한 번도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두꺼운 파카를 입고 다니는 12월 한복판에서 나는 등줄기에 땀이 한줄기 흐르는 기분이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어쩔뻔했는가?
아버지의 '그런 건 물을 필요가 없네'는 저 아이는 아들이니 아들인지 딸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는
그런 뜻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는 신나셨고 며느리를 볼 때마다 함박웃음을 지으셨으며 며느리를 위해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주셨다.
나중에 둘째를 가졌을 때도 여전히 기뻐하셨고 함박웃음을 지으셨고 많은 것들을 해주셨지만
왠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해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