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천 이야기① 살천과 살수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65) 전천, 살천, 살수, 청천, 살내

by 이무완


동해시 북평들을 지나는 ‘전천’은 살천, 융천, 소고리천, 북천, 혈천 같은 딴 이름들도 있다. 오늘은 이 가운데 ‘살천’이 어떻게 생겨난 이름인지 한번 톺아보려고 한다. 살천은 보살 살(薩) 자, 내 천(川) 자를 썼다. 잘 알다시피 ‘보살’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불도를 닦는 사람을 가리키는 ‘보리살타’의 줄임말이다.

전천_송정해수욕장008.JPG 전천 끝자락. 뒤편으로 멀리 두타산과 청옥산이 보인다. 오른쪽엔 쌍용씨엔이 동해공장이다.


살수가 청천강이 맞나?

냇줄기와 보살이 도대체 어떻게 이어지는지 어리둥절하지만, 살천의 ‘살’ 자는 소리 [살]을 받아쓴 말마디일 수밖에 없다. ‘살천’과 비슷한 물줄기 이름으로 ‘살수(薩水)’가 있다. 지금부터 1400여 년 전 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 때다.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를 무릎 꿇릴 요량으로 2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쳐들어 온다. 그러나 고구려군 꾀임에 속아 살수에서 군사 30여 만을 잃는다. ≪삼국사기≫권20 <고구려본기 제8>을 보자.


수나라 장수 (우문)술은 고구려군에게 하루에 일곱 차례 싸워 모두 이기자 거듭하여 이기리라 믿고 또 여러 사람 뜻에 떠밀려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등지고 진영을 쳤다.(述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끌어들일 요량으로 싸우는 척 일부러 져 주면서 수나라 군사를 고구려땅 깊숙히 끌어들인다. 그리곤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고 만약 군대를 돌린다면 마땅히 수 양제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겠다고 한다. 이에 수나라 장수 우문술은 지친 군사를 몰아 험하고 견고한 평양성을 치기란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을지문덕이 항복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말머리를 돌린다. 돌아가던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이르렀을 때, 숨어 있던 고구려 군사가 그 뒤를 득달같이 나아가 친다.


[영양왕 23년(612년)] 가을 7월에 살수에 이르러 (수나라) 군대가 반쯤 건너자 아군이 뒤에서 뒤따르는 군사를 쳐,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죽었다. 이때 여러 군대가 함께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병졸이 달아나 돌아갔는데, 하루 낮 하루 밤에 450리를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丗校勘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渌水, 行四百五十里.) (≪삼국사기≫ 권20)


이때 수나라 군사 30만 5천 가운데 살아서 요동성으로 돌아간 수는 고작 2,700명이라고 한다. 이 전투가 바로 ‘살수에서 크게 이긴 싸움’인 ‘살수대첩’이다. 그리고 ‘살수’를 오늘날 평안북도와 평안남도를 가르는 청천강이라고 배웠다.

동해-전천-살수_압록수.jpg 지도 출처: 구글지도


살수는 고유이름씨가 아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3을 보면 ‘살수’는 우리가 아는 그곳이 아닐 수도 있다.


[고구려 태조] 4년(56) 가을 7월에 동옥저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영토를 넓혀 동쪽으로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 살수(薩水)에 이르렀다.

(四年, 秋七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고구려 태조 때인 56년 일인데, 여기에 ‘살수’가 보인다. 고구려 땅이 동쪽으로는 ‘창해’에 닿고 남쪽으로는 ‘살수’에 이른다고 하니 어리둥절하다.

한편 494년에 고구려군이 신라군과 살수에서 부딪혔다가 백제군이 돕는 바람에 고구려군이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살수’는 ‘견아성’에서 그닥 멀지 않은 곳이라야 한다.


[고구려 문자왕 3년(494년)] 가을 7월에 우리 고구려군이 신라군과 살수 벌판에서 싸웠는데, 신라군은 패하자 견아성으로 [물러나〕지켰다. 우리 군대가 성을 포위하니 백제가 병력 3,000명을 보내 신라를 지원하여 우리 군대가 물러났다.

(秋七月, 我軍與新羅人, 戰於薩水之原, 羅人敗, 保犬牙城. 我兵圍之, 百濟遣兵三千, �新羅, 我兵引退.) (≪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 제7>)


5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힘센 나라는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해 남으로 영토를 넓혔고 서로는 요동 지역에 이르렀다. 광개토대왕에 이어서 왕이 된 장수왕(412~491)은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기고 백제 도읍인 한성(서울)을 빼앗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다. 이때 백제는 도읍을 웅진(공주)로 옮겨야 했다. 그렇다면 5세기인 494년에 신라가 평양성보다 더 북쪽에 있는 ‘살수’에 군사를 보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견아성’을 충북 보은이나 경북 상주 장암면에 있는 견훤산성, 경북 문경 서쪽으로 보기도 하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 권37에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적었다.

동해-전천-살수_고구려신라전성기.jpg

다시 살수대첩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제8>을 보면, 우문술이 이끄는 군대가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등지고 군영을 쳤다(於是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는 대목이 나온다. 우문술이 이끄는 군사가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서 30리 밖에 이르렀다고 하면 이때 ‘살수’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청천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약용조차도 ≪아언각비≫(박성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21, 180~181쪽)에 ‘살수’를 ‘청천’( 薩水 卽淸川)으로 기록한 대목은 아쉽다.

내 생각에 ‘살수’라는 땅이름은 고유이름씨가 아니라 두루이름씨다. 땅이름은 본디 배달말 땅이름이 먼저 있고 한자로 쓴 땅이름은 뒤에 생겨났다. ‘살매’나 ‘살수’는 한자로 받아적은 땅이름이다.


‘살-’은 ‘설-’과 통한다

‘매’와 ‘수’는 강이나 내(川)를 가리키던 옛말이니 두고, ‘살’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톺아보자. 배달말에서 ‘살-’이 들어간 말 몇 개를 떠올려 보자.


살별 가늘고 긴 꼬리가 있는 별.

살여울 물살이 빠르고 세찬 여울

열살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서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여울


이때 ‘살’은 ‘살천’이나 ‘살수’로 빗대어보면 ‘빠르고 세차다, 가늘고 길다’는 뜻을 보탠 말로 볼 수 있다. 한편, 살얼음, 살물결에서 ‘살-’은 온전하지 못함, 얇음이란 뜻을 보태기도 한다. 살살, 살짝, 살랑살랑, 살근살근 같은 말 느낌도 그렇다. ‘살-’과 뜻이 어금지금한 앞가지로 ‘설-’이 있다. 설잠, 설깨다, 설익다, 설듣다, 설보다, 설겅설겅하다, 설매다, 설뽑다 말 따위에서 보듯 ‘살’과 ‘설’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살’을 ‘온전하지 않음, 충분치 않음’의 뜻으로 보면 ‘살수’는 ‘얕은 내’다. 이렇게 보면 ‘살수’의 다른 이름인 ‘설수, 설하수, 설합수’ 같은 이름도 설명할 수 있다. ≪책부원귀(册府元龜)≫ 권135(왕흠약, 1013)에서 ‘살수대첩’을 기록한 대목을 보면 ‘살수’가 아닌 ‘설수’로 나온다.


임인년 7월에 우문술 등이 설수(薛水)에서 연거푸 패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죽었고 9군이 함께 무너졌다. (설수에서) 도망쳐 하루에 450리를 내달려 압록수에 닿았다. 처음 9군이 요하를 건너갈 때는 30만 5천이었으나 요동동에 돌아온 이는 고작 2천7백뿐이더라.(七月壬寅, 宇文述等, 敗績于薛水, 右屯衛將軍辛世雄死之, 九軍竝陷, 一日一夜, 還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度遼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

또,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제10>에서는 ‘살수’를 ‘설하수’로 썼다.


[고구려 보장왕 27년(668년)] 천남건이 다시 병력 50,000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하려고 하였지만,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맞붙어 싸워서 패배하여 죽은 자가 3만여 인이었다. 이적이 대행성(大行城)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泉男建復遣兵五萬人, 救扶餘城, 與李勣等遇於薛賀水, 合戰敗, 死者三萬餘人.勣進攻大行城.)


이들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때 ‘살매, 살천, 살수, 설수, 설하수, 설합수’를 섞어 썼으며, ‘살수’나 ‘설수’는 물살이 제법 빠르게 흐르는, 얕은 강이나 내를 가리키던 말로 바꿔 생각해봄직하다.

애초 배달말 땅이름이 먼저 있고 그 이름에 맞춰 말재기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덧붙은 셈이다. 모두 배달말을 받아적을 글자가 없어 한자로 적다 보니 생겨난 일이다. 옛말에서는 닿소리와 홀소리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까닭에 사람이나 지역에 따라 ‘살, 설, 술, 솔, 사리, 서리, 수리……’처럼 다양한 꼴로 둔갑한다. 자연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 뜻이 아닐 수 있다. ‘수리’에서 온 ‘살’로 보면 ‘높은 곳을 흐르는 내’가 될 테고, ‘솔다’에서 온 말로 보면 ‘좁다란 계곡을 빠르게 흐르는 내’로 볼 수도 있다. ‘살얼음’이나 ‘설잠’에 든 ‘살-/설-’로 보면 ‘얕은 내’로 봐도 어색하지 않다.


살매와 살수가 ‘청천’이 되다

그렇다면 ‘살매’나 ‘살수’가 어떻게 ‘청천’으로 훌쩍 건너뛰었을까. ≪삼국사기≫ 권34를 보자.


청천현(淸川縣)은 본래 살매현(薩買縣)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清川縣, 本�買縣,景徳王攺名. 今因之.)


‘청천현’은 오늘날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쯤으로 본다. ‘살매>청천’의 관계로 보면, ‘살(薩):청(淸)’, ‘매(買):천(川)’처럼 대응한다. 한자 뜻으로 풀면 ‘맑은 내’다. 물줄기가 어떻게 흐르고 어디를 흐르냐에 따라서 내 이름이 다르다. 솔은(좁은) 골짜기 사이로 흘러가는 냇물(買)이라서 ‘솔매>살매’고, 산으로 둘러 막힌 골 사이로 흐르는 내라고 해서 ‘막은내>마근내>말근내>맑은내>청천’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살수대첩을 거둔 역사의 현장이라면 골이 좁고 깊은 곳이라야 물을 막았다 터트렸을 때 무시무시한 힘은 낼 수 있다. 이름만 있지 그곳이 어딘지 분명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많은 물을 가두었다가 터트려 적을 치자면 물이 다른 곳으로 새지 않는 막힌 곳(막은내)이어야 하고, 사람을 물에 빠뜨려 정신을 잃게 할 만큼 세찬 물줄기를 이루는 곳(살내)이어야 한다. 물줄기가 어떠냐에 초점을 두면 ‘살내→ 살천→ 살수’ 같이 바뀌어 왔을 테고, 어디를 흐르냐에 방점을 찍으면 ‘막은내→ 마근내→ 말근내→ 맑은내→ 청천’ 같이 바뀌어 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너에게 감동해_전천.jpg 전천을 화살이 떠내려온 내로 설명했다. '왜군'을 '외군'으로 적은 잘못도 보인다.

전천과 살천과 살내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전천의 딴 이름인 살천은 보살 살(薩) 자, 내 천(川) 자를 썼다. 배달말로 뒤치면 ‘살내’다. 오늘날 물줄기로 봐선 골짜기 사이로 세차고 가늘게 흐르는 내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만 석회암 지대를 얕게 흐르는 내로 보면 ‘살내’로 볼 수 있다. ‘살내’는 소리 받아 적기로 살천(薩川)이 되는데, 말밑이 흐리터분해지면서 책상물림들 붓끝에서 살 전(箭) 자를 쓴 ‘전천’으로 기록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여기에 임진왜란 때 두타산성 전투나 허병장 이야기를 섞어 사실성을 보태 ‘화살이 떠내려온 내’라서 ‘전천’이 되었다고 하는데, 내 보기엔 말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게으름으로밖에 안 보인다. 더욱이 초등학교 사회 보조교과서에서도 한자 뜻을 그대로 뒤친 ‘화살이 떠내려온 내’라서 ‘전천’이 되었다고 가르치고 배우니, 역사 왜곡이 그리 먼 데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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