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67) 슬치, 무릎재, 무름재, 마름재
(위 사진은 2024년 4월에 찍은 무릅재 모습으로 2022년 봄 산불로 시커멓게 탄 나무들이 그대로 서있다.)
‘무릅재’, ‘무릎지기’라고도 하고 ‘무름재’, ‘마름재’라고도 한단다. 한자로 쓴 고개 이름은 ‘슬치(膝峙)’다. 무릅재는 매봉산(응봉산)으로 느릿하게 흘러온 산줄기가 갈전동을 지나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초록봉으로 이어지는 데다. 여기서 만우골로도 가고 비천골로도 승지골로도 넘나드는 ‘사잇재’다. ≪동해시 지명지≫(2017)에서 땅이름 유래를 모아보면 이렇다.
부곡동의 승지동과 만우동 및 비천동이 만나는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개를 가리킨다. 경도 129도 3분 위도 37도 32분에 위치하며 해발 350m 가량의 고개이며 흔히 마름재라 하기도 한다. 조금 높은 고개를 큰재, 작은 것을 작은재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무름재가 원래의 호칭이었으나, 흔히 무릅재로도 통하며 한자로는 膝峙(슬치)로 표기한다. (124쪽)
매봉산에서 초록봉으로 가는 산줄기의 중간에 있는 재. (……) 무름재와 무릅재로 흔히 부르고, 무릎지기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膝峙(슬치)로 표기한다. (……) 산줄기의 생김새가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는 데에서 무릅재라 이름이 붙은 듯하다. (140~141쪽, ※ 아래 지도에서는 ‘매봉산’은 ‘응봉산’으로, ‘초록봉’은 ‘초록산’으로 적음)
무릅재, 무릎지기, 슬치는 ‘무릎’을 말밑으로 한다면, ‘무름재’와 ‘마름재’는 말밑을 짐작하기 어렵다. 무릅재는 “산줄기의 생김새가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모습”(141쪽)에서 왔다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봐야 사람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모습처럼 보일까. 구부린 다리 모양을 말할까, 그도 아니면 엎드린 등판을 말할까.
내 보기에 ‘무릅재’에서 ‘슬치’가 생겨나지 않고 ‘슬치’를 배달말로 뒤치면서 무릅재, 무릎지기, 무름재 같은 말들이 생겨난 듯하다. ‘슬치’는 무릎 슬(膝) 자와 고개 치(峙) 자를 쓴다. 이때 ‘슬’은 한자의 뜻과는 상관 없이 소리를 받아적은 글자로 보면 어떨까. ‘슬’이 홀소리 바꿈으로 생겨난 말로 보면 ‘술/솔/설/실’ 같은 소리로 바꿔 생각해봄직하다. 그리고 더 거슬러 가면 이들 말의 뿌리는 ‘수리’다. 수리는 높은 곳, 으뜸, 맨 꼭대기를 뜻한다. 수리는 매우 다양하게 꼴바꿈을 하면서 언뜻 보아서는 원래 뜻을 알아채기 어려울 때가 많다. 게다가 바뀐 꼴에 맞춰 그럴 듯한 해석이나 이야기들을 품고 있어서 더욱 헛갈리게 한다. 짐작건대 슬치는 높은 재라고 해서 ‘수리티’라고 했는데 ‘술티→ 슬치’처럼 되었으리라. 그런데 ‘수리’에서 온 말임이 흐리터분해지고 ‘슬치’를 배달말인 ‘무룹재’로 뒤치면서 ‘무릎지기, 무름재, 마름재’ 따위로 소리바꿈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전라남도 해남군에는 우슬치(牛膝峙)라고 고개가 있다. 해남읍에서 동쪽으로 통하는 유일한 고개로 만대산과 덕음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중간에 있다. 소가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엔 ‘우슬치’를 ‘우사현’(于沙峴)이라고 적었다. 이때 ‘우’(于)는 뜻 없는 어조사고, ‘사’(沙)는 몰애(모래), ‘현’(峴)은 재(고개)를 뜻한다. 차례로 뒤치면 ‘우+몰애(말)+재’로, 아마도 ‘웃마ᆞ갈재’(웃마루재)를 한자 뜻소리로 받아적은 땅이름으로 볼 수 있다. 자연히 ‘우슬’은 ‘쇠무릎’이 아니라 ‘웃마루’를 뜻하는 말로 봐야 한다.
물론 달리 해석해 볼 여지도 얼마든지 있다.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는 사슬치(沙瑟峙)란 고개가 있다. “모래로 형성되었다 하여 사실치라고 하다가 훗날 사슬치”라고 했다고 한다. ‘우슬치’와 비슷한 맥락으로 생겨난 이름으로 보면 단순하게 사슬치도 모래(沙)가 많은 고개로 보기 어렵다. ‘사’를 사이, 새(間)를 뜻하는 말로, ‘슬’은 골이나 마을을 뜻하는 옛말 ‘실’로 보면 마을과 마을을 잇는 사잇재로 볼 수도 있다. ‘사이+실+티’의 짜임으로, ‘사이실티→새실티→ 새실치→ 사실치→ 사슬치’로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동해시 삼화동에 ‘사실고개, 사실골’ 같은 땅이름이 있다. ‘사실고개’는 너비령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고개로 삼화동 사실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인 사실골과 이로동 죽림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다. ‘사실목’, ‘사실목이’, ‘사실메기’라고도 한다. 이 고개도 두 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다.
그러나 ‘슬치’에서 ‘슬’은 골이나 마을을 뜻하는 ‘실’로 보기엔 다소 어색하다. 수리봉, 수리바위, 수리재, 수리산에서 보듯, ‘수리’가 바뀐 꼴로 볼 때 한결 해석이 깔끔하다. ‘수리티’가 ‘술티, 술치’를 거쳐 ‘슬치’처럼 썼는데, 시간이 흘러 ‘슬’이 ‘수리’에서 온 말인 줄 몰랐을 수도 있고 알고도 한자로 받아적으면서 무릎 슬(膝) 자를 써서 ‘슬치’라고 했을 수 있다. 그런데 ‘슬치’를 쓴 한자 뜻에 이끌려 ‘무룹재’(1970년대)가 되고 ‘무릅재’(1980년대 이후), 무릎지기, 무름재, 마름재 같은 땅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여기엔 ‘무릎’을 [무룹]이라고 소리내는 지역 말 영향과 함께 ‘느릅재’와 같은 고개 이름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더욱이 느릅재는 산줄기가 느릿하게 늘어진 고개인데, 무릅재도 산줄기가 동남쪽으로 느릿하게 흐르는 특징도 무룹재를 무릅재로 바꾸게 했을 수 있다. 다만, 기록이 많지 않으니, 지금 이름만 봐서는 말밑이 무엇이었는지 딱 잘라 말하기엔 뒷맛을 썩 개운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