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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병과 PET와 풀병

일본식 영어2: 일본말 '페또보또루'를 곧이곧대로 끌어다 쓴 말

by 이무완

운동장 가 그네의자에 페트병이 하나 있다. 그걸 주워서 들고 오는데 1학년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는 그거 페트, 누가 버린 거예요 하고 묻는다. '페트병'도 아니고 '페트'라고 해서 흠칫 놀랐다.

"흐음, 누가 그랬을까? 그런데 '페트'가 무슨 뜻인지 알아?"

"플라스틱병이잖아요, 에이, 그것도 모를까 봐요."

히힛 그렇지. '페트', '페트병'이란 말은 이제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 쓰는 말이 되었다.


문득 말밑이 궁금하다. '페트'는 영어로 쓰면 'PET'(피이티)다.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olyethylene terephthalate)를 줄여 쓴 말로, 석유 성분에서 뽑아 굳힌 '수지'를 일컫는 전문용어다. 그런데 영어사전에서 'pet'(페트)를 찾으면 이런 뜻은 보이지 않는다.


pet [명]

1. A domesticated animal kept for companionship or entertainment (반려동물)

2. special loved one (남달리 사랑하는 사람)

3. Bouts of tantrums or irritability (especially when barely felt) (뇌전증이나 불쾌한 발작 (특히 약간 느껴지는 곳))

4. The use of computerized radiographic techniques to study metabolic activity in various tissues (particularly the brain) (다양한 조직(특히 뇌)의 대사 활동을 조사할 목적으로 사용하는 컴퓨터 X선 사진 기술)


사전에서 알 수 있듯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한테 '페트'는 '반려동물'을 먼저 떠올리지 우리처럼 플라스틱 '병'을 생각하지 않는다. 영어로 '페트병'은 '플라스틱 보틀'(plastic bottle)이라고 한다. 'PET' '페트'라고 소리내지 않고 '피이티'라고 읽는다.


말난 김에 신문 기사를 뒤져보니 1982년 5월 26일 <동아일보> 5면에 '페트병'이라는 말이 처음 보인다.

<동아일보> 82. 5. 26. 26면 ‘경제 단신’ Ⓒ동아일보

보해소주라는 회사에서 유리로 만든 소주병을 가볍고 깨지지 않는 '페트병'으로 바꾼다는 소식이 정말 짤막하게 실렸다. 그뒤 드문드문 쓰다가 1990년 이후부터 부쩍 늘어나더니 이제는 우리 일상 곳곳에 깊숙이 들어왔다. 그런데 이 말은 어느 모로 보나 일본말 '페또보또루'(ペツトボトル)를 줏대 없이 따라간 말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페트병'이나 '플라스틱병'이란 말 말고 곧잘 '풀병'이라고 했다. '플라스틱병을 줄인 말인지 풀처럼 가볍고 흐물거리는 병이라는 뜻으로 붙인 말인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페트병'을 '피이티병'이나 '플라스틱병'으로 바꾸긴 어렵지만 이 말이 일본말 '페또보또루'에서 왔음을 알고나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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