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영어3: 잠바는 점퍼가 일본말 '잔바'를 거쳐 굳은 말이다.
운동장 계단에 검은색 잠바 하나가 놓여있다. 비 온다는 말이 있는데, 그냥 두나 마나 망설이는데, 주무관 한 분이 보고는 “하이구, 언눔이 춘 줄도 모르고 잠바때기를 또 처내삐리두고 갔네, 원.” 하면서 혀를 끌끌 찬다.
잠바때기라는 말이 내 귀에 와닿는다. 어쩌다 ‘점퍼’는 이 땅에 와서 ‘잠바’가 되었나. 일본어 사전인 <디지털다이지센>을 보면 ‘잔바’(ジャンパー)를 다음과 같이 풀어놨다.
1. 運動用・作業用の、ゆったりした上着。防寒・防水にも着用する。ジャンバー。(운동하거나 일할 때 입는 헐렁한 겉옷, 추위를 피하거나 비를 막을 요량으로 입는다.)
2. 「ジャンパースカート」の略。(「점퍼 스커트」의 줄임말)
[補説] 語源は英語の方言 jump(短いコートの意)に-erの付いたもの。(말밑은 영어 사투리 ‘점프’(jump, 짧은 코트)다. 이 말에 뒷가지 ‘-er’이 붙었다.)
‘잔바’(ジャンパー)라고 했지만 말밑이 영어 ‘점퍼’(jumper)라고 했다. 15세기 영국 사람들이 입던 ‘커틀’(kirtle)이라는 긴 옷이 있는데, 그 옷을 위아래로 갈라서 윗부분을 따로 ‘점프’라고 했고 이 옷이 뒷날 '점퍼'가 되었다고 한다. <영어사전>에서 ‘점퍼’는 우리가 머리로 아는 뜻하고는 조금 다르다.
노동자나 뱃사람이 일할 때 입는 '일옷'뿐만 아니라 블라우스나 스웨터 위에 앞치마처럼 입는, 소매 없는 여성용 겉옷이나 스웨터도 모두 '점퍼'라고 해놨다. 이 점퍼가 일본말로 '잔바'가 되었다가 개화기에 이 땅에 들어와 '잠바'가 되었다.
1927년 1월 20일 <조선일보> 3면을 보면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연합바자대회에 마흔 점이나 되는 물건을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잠바’가 있다. 이로 미루어 이미 이때 ‘잠바’라는 말을 널리 썼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잠바’는 그닥 고급스러운 옷으로 생각하진 않은 듯하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7일치 3면 「바라보면 한숨뿐 양복점 앞의 월급자 한탄」에 보면 ‘잠바’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야 알고 보면 「세비로」를 「쓰메에리」로 만드렀다가 외투로 「잠바-」를 만드렀다가 「쓰봉」에다가 헌 조끼들을 덧부치어 웃저고리 하나를 만드렀다가 어째떤 온갖 재조를 다 부려오던 남어지 인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나종에는 생각다 못하여 장롱 속에 너허두고 “이거야 참아 어떻게 입으시오” 하며 안해까지 입기를 주저하는 (가운데 줄임) 옷을 입고 나오니 그래도 명색이 옷이라 우선 살은 가리나 웃저고리는 팔이 뒤꿈치까지 나오고 바지는 다리가 정갱이에 찬다.
‘잠바’는 이 옷 저 옷에서 잘라낸 천으로 어떻게든 재주를 부려 지은 외투라고 했다. 우리가 알기로 잠바는 대개 품이 넉넉한 겉옷을 말하는데, 여기선 팔 뒤꿈치가 나올 만치 소매가 짧다. 옷이라 살을 가릴 요량으로 입긴 해도 입으려니 썩 내키지 않는, 거북스러워하는 마음도 느껴진다.
유래가 어찌 되었든 오늘날 '잠바'는 우리 말이 되었다. 다만 일본말에서 ‘잔바’는 뜨개질한 겉옷인 ‘스웨터’, ‘파카’(parka)나 ‘후디’(hoodie), ‘재킷’(jacket)처럼 헐렁한 겉옷들을 싸잡아 일컫는다. 하지만 우리 말에서 잠바는 겉옷은 맞지만, ‘잠바때기’라는 말에서 보듯 일할 때 입는 품이 넉넉한 겉옷이나 격식을 차리지 않을 때 입는 재킷 정도로 의미가 좁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