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26)
정선군 북평면 나전리 남쪽에 ‘배미’란 마을이 있다. 우리가 밭을 셀 때는 흔히 한 뙈기, 두 뙈기 한다면, 논은 한 배미, 두 배미 하고 헤아린다. 이때 ‘배미’는 논두렁으로 둘러싸인 한덩어리 논을 말하거나 논뙈기를 헤아릴 때 쓰던 말이다. 사실 논밭에 엎드려 살던 농사꾼은 높배미, 긴배미, 우묵배미, 구렁배미, 반달배미, 장구배미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앞뒤 없이 마을 이름이 ‘배미’라니 둥덜할 뿐이다. 이에 ≪정선 북평면 지명유래≫(북평면, 2007, 151쪽) 설명은 이렇다.
남평나루터 건너 민둔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수리봉을 중심으로 배미와 아랫배미로 나뉘어 있다. ‘배미’는 논이 많은 곳이나 논을 바라보는 곳에서 논배미의 ‘배미’를 취한 지명이다. 지명에 나타나는 ‘배미’는 ‘바미(밤이)’로 되어 한자화하면서 밤 ‘야(夜)’ 자를 취해 ‘야미(夜味)’가 되기도 한다.
논배미의 ‘배미’가 ‘바미(밤이)’로 소리바꿈한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야미’가 되었다는 말이다. 지역말에서 ‘배미’를 ‘바미’, ‘밤’로 쓰기도 한다. ≪조선지지자료≫(1911)엔 “夜味 배미”로 적어놨다.
찾아보니 우리 땅 여러 곳에 ‘야미’라는 땅이름이 있다. 말밑을 찾아보면 ‘배미’와 소리값이 어금지금한 ‘논배미’는 두말할 나위 없고 ‘밤(栗), 밤(夜), 뱀(蛇)’과 관련지어 들어놓은 유래가 뒤섞여 있다.
전북 군산시 옥도면에 ‘야미도’라는 섬이 있다. 군산에서 18킬로미터 거리인데 새만금방조제로 지금은 섬 아닌 섬이다. ≪곽재구의 포구기행≫에 보면 “배는 군산항을 떠난 지 1시간 30분 만에 고군산 열도의 첫 섬인 야미도에 닿았다. 이름이 좀 낯설어 한 촌로에게 물었더니 예전의 이름은 밤섬이었다고 한다. 밤나무가 섬에 많았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밤 야(夜)에 맛 미(味)로 엉뚱하게 바뀌어 야미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고 썼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빠진 대목이 있다. 18세기 중반에 나온 ≪해동지도≫는 물론, ≪대동여지도≫(1861)에 이미 ‘야미도(夜味島)’가 보이기 때문이다. 한번 굳어진 땅이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웬만해선 바뀌지 않는다. 이를 생각하면, 야미도도 ‘배미’를 ‘야미(夜味)’로 적은 데서 말미암았다는 해석에 더 힘이 실린다.
이처럼 ‘야미도’를 ‘밤섬’ 설로 설명하지 못하듯, 정선의 ‘야미(배미)’도 단순히 ‘(논)배미’ 설만으로 감당하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백 걸음 물러나 정선 ‘야미’ 마을도 ‘논이 많은 곳이나 논을 바라보는 곳’이라서 논배미의 ‘배미’를 따온 땅이름이라고 치자. 하지만 여전히 물음이 가시지 않는다. 강 건너 남평들 논이 환하게 보인다고 한들 그게 뙈기논 하나 없는 마을에서 무슨 소용이람.
야미(배미) 마을 앉음새를 보면, 상정봉과 민둥산 사이 고즈넉한 골짜기 마을로, 나름 펀펀하지만 보는 눈길에 따라 반은 산이다. 우리 말에 사이가 떠서 벌어졌다는 뜻으로 쓰는 말로 ‘반-’이 있다. 뫼 사이 벌어진 곳이라서 ‘반뫼/반메’라고 했고 이 말이 ‘반미→ 방미→ 밤미→ 야미’로 바뀌지 않았을까. 비슷한 보기로 ‘밤골’로 들 수 있다. 밤골은 실제로 밤나무가 많은 곳도 있지만 아예 밤(栗)하고는 관련이 없는 곳도 허다하다. 밤골 가운데 골짜기가 벌어진 데 있어서 ‘반골’이라고 했는데, ‘반골→ 방골→ 밤골’로 바뀐 곳도 있다.
요컨대, ‘배미’가 삶에 가까운 말이지만 소리바꿈과 함께 한자로 뒤치는 과정에서 ‘야미’라는 이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야미’를 ‘논배미’로 풀기는 어렵다. 마을 앉음새와 마을을 둘러싼 산줄기와 말의 바뀜을 두루 살핀다면 ‘반뫼’처럼 산과 산 사이 벌어진 땅 모양에서 말미암은 땅 이름일지도 모른다. 모든 땅이름은 글말보다 입말이 먼저이며, 그 땅에 터잡고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뙈기논 큰 토지에 딸린 조그마한 논.
뙈기밭 큰 토지에 딸린 조그마한 밭.
뙈기 경계를 지어 놓은 논밭 한 덩어리나 논밭을 헤아리는 단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