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28)
배달말에 ‘재’가 있다. 사전을 보면 ‘길이 나 있어서 넘어 다닐 수 있는 높은 산의 고개’나 ‘높은 산의 마루를 이룬 곳’으로 풀이해 놓았다. 오늘날 귀에 더 익은 말은 ‘고개’다.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1527)를 보면, 산과 고개를 가리키는 말을 한자 새김으로 가려 적었다.
山 묏 산 嶂 뫼 쟛 嶺 재 령 峴 고개 현
우리 조상들은 산을 한 가지로 뭉뚱그려 보지 않았다. 집을 짓거나 연장을 마련하거나 보를 막을 적에 쓸 나무를 품 들여 가꾸던 산은 ‘갓’이라 한다. 굳이 한자로 쓴다면 임산(林山)이 되려나. 암튼 갓에는 ‘갓지기’를 두어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했다. 머리에 쓰는 갓과 구별할 요량으로 ‘갓’을 ‘묏갓’이라고도 했고, 보를 지을 요량으로 나무를 가꾸는 갓은 따로 ‘보갓’이라 했다. 이에 견줘 마을 뒤를 둘러싼 산은 ‘재’라고 했다. 마을은 대개 산을 등지고 개울을 끼고 자리잡는데, 그 등진 산을 말한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주산(主山)과 겹친다. 사람들은 재를 오르내리며 길을 내고 밭을 일구었다. 난리라도 나면 잿마루에 올라 먼 데를 내다보며 화를 피하기도 했다. ‘뫼’는 갓과 재를 아우르면서 크고 높은 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런데 한자말 ‘산’이 들어와 갓, 재, 뫼를 내쫓고 주인 행세를 한다. 뜻과 느낌이 다른 말이 ‘산’으로 뭉뚱그려졌지만 그래도 우리 땅이름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갓과 재와 뫼를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김수업이 쓴 ≪우리말은 서럽다≫(나라말, 2009)를 읽어보길 권한다.)
오늘날 ‘재’라 하면 으레 ‘고개’를 떠올리지만, 본디 ‘재’는 마을을 감싸는 산을 뜻했고 ‘자’나 ‘잣’이라고도 했다. 그렇다고 하면 ≪훈몽자회≫에 보이는 “城 잣 셩”이라는 새김을 어떻게 봐야 할까. 옛 우리 말에서 성(城)을 뜻하는 말은 ‘잣’이었다. 성(城)은 흙(土)으로 쌓았다(成). 그러다 차츰 돌로 쌓았는데 때로는 나무 말뚝을 죽 잇따라 박은 목책을 둘러 성으로 삼기도 했다. 백성들은 집 둘레에 대나무나 갈대 따위로 엮은 ‘바자’를 둘러 쳤는데, 이를 ‘바자울’이라 했다. 이때 ‘바자’는 ‘발’(가늘고 긴 나무나 풀줄기)과 성처럼 둘러쳤다 하여 ‘잣’이란 말을 엮어 쓴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을을 둘러싼 ‘재’에 잣(성)을 쌓았기에, ‘잣’은 곧 ‘재’이기도 했다. 그래서 성(城)을 ‘잣’이나 ‘재’로 새겼고 동시에 ‘잣’은 재처럼 높은 곳, 고갯마루라는 뜻도 슬그머니 품는다.
정선 지역 땅이름에서 그 흔적은 곳곳에 나타난다. 먼저 정선읍 용탄리 터골 남쪽의 ‘자랑골’은 ‘잣’과 ‘안골’을 붙여 만든 ‘잣안골’이 말밑이다. ‘잣 안쪽 골짜기’란 뜻으로 볼 수 있다. 남면 무릉리에 있는 ‘자고치’는 ≪조선지지자료≫(1911)에 ‘재고개’로 나오는데, ‘잣고개’가 말밑이라고 하겠다. ‘재’와 ‘자’의 뜻넓이가 겹치면서 ‘자고개’라고 했는데 이 말을 누군가 어설프게 뒤치면서 ‘자고치’로 둔갑한다. 자고치는 시루봉 아래에 있다 하여 ‘시루봉재’라는 별명도 있다. 증산 서쪽 두리봉 북쪽 골짜기 아래의 ‘자뭇골’은 ≪조선지지자료≫에 ‘자무ᄭ골’로 나온다. 아마도 ‘잣+으+골’이 ‘자므골’을 거쳐 ‘자무꼴’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뒷날 높은 곳이나 재를 뜻하는 ‘자’를 길이 재는 자로 데알고 자 척(尺) 자를 써서 ‘척산(尺山)’이란 엉뚱한 한자 이름으로 지어냈다고 하겠다. 정선읍 북실리 ‘잣골’은 잣(재)에 있는 마을이니 잿골이다. 높은 데 있는 산마을로 뒤쳐 생각할 수 있다. 임계면 용산리에 있는 ‘자후산(885m)’은 ‘잣뒤산’을 한자로 옮겨면서 생겨난 땅이름이다. 잣투산·재투산·자추산 같은 여러 이름이 있는데, 여기서 ‘자’는 옛말 ‘잣’에서 ㅅ이 떨어진 꼴이다. ‘잣뒤산’은 ‘재 뒤에 있는 산’이나 ‘재 너머 있는 산’으로 볼 만하다. ‘잣바우’는 꼭 바위 이름 같지만 남평리 큰골에서 애산리나 여탄리로 넘나들던 고개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는 둘레보다 우뚝한 땅덩이를 가리켜 모두 ‘산’이라 한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갓과 재와 뫼로 쓰임과 선 자리, 우리 삶과 관계를 따져 가려 썼다. 말이 달랐기에 산을 바라보는 눈도 달랐다. 말이 흐려지면 세상을 보는 눈도 그만큼 흐릿해질 수밖에 없다.
[일러두기] ‘재고개’처럼 붉고 굵은 글씨로 쓴 글자는 아래아(•)를 홀소리로 쓴 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