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밭, ‘친구네 밭’이 아니라 ‘사이 밭’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47)

by 이무완

삼각산 모르는 빗방울이 잇스며 인왕산 모르는 범이 잇스며

정선북면 우메주 벗밧 모르는 마가목이 잇스며

엇지 날 모르는 하이칼라가 어대 잇스랴


<정선아리랑> 노랫말 한 대목이다. 여기서 ‘벗밭’은 높은터(고기) 동쪽에 있는 마을로, 북쪽 갈미봉에서 남쪽 백석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사이에 있다. 해발고도로는 700미터가 넘는다. 얼핏 들어도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골짜기임을 알 수 있다.

배달말에서 ‘벗’이라 하면 누구라도 ‘친구’를 먼저 떠올리겠다. 벗밭을 한자로 쓴다면 벗 우(友) 자를 써서 ‘우전(友田)’이라고 쓸 법하다. 하지만 ‘친구네 밭’이 마을 이름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고개를 삐끗 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가 하고 사전에서 ‘벗’을 찾아보았다.


① 염전에서 소금을 굽는 가마, 또는 그러한 시설을 갖춘 집(=벗집)

②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

③ 불씨에서 불이 옮겨붙는 장작이나 숯


바다 가까운 곳이라면 바닷물을 길어다 가마에 붓고 끓여 소금을 굽는 ‘벗’이나 ‘벗집’이 있었을 수 있고, 거기서 ‘벗밭’ 같은 이름이 나올 수도 있겠다. 실제로 경기도 안산시 대부북동에는 ‘벗말’이 있고, 인천광역시 옹진군에도 소금가마가 있던 갯마을이라 하여 ‘벗마을’, ‘벗개’ 같은 땅이름이 남아 있다. 그러나 벗밭은 바다에서 한참 떨어진,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이런 곳에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③번 뜻으로도 생각해봄직하나 이는 장작이나 숯을 가리키는 말이지 마을이나 골짜기 이름으로 쓰기에는 어색하다.

이쯤에서 ≪정선 북평면 지명유래≫(북평면, 2007, 177쪽)의 설명을 살펴보자.


일설에는 옛날에 우정이 두터운 사람들끼리 살던 마을이라 하여 우전(友田)이라 불렀다고 하나, 마을 형국이 와우형(蝸牛形)이어서 ‘牛田’이라 부르던 것을 ‘우’ 자를 한자로 옮기면서 벗밭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줄임) 지대가 높은 벗밭은 앞산인 가리왕산과 왼쪽의 백석봉, 뒷산인 말미봉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마을 형국이 와우형이어서 우전”이 되었다는 말인데, 나 같은 어리보기는 거푸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와우(蝸牛)는 달팽이다. 달팽이 모양을 닮은 땅이라면 ‘달팽이밭’이나 ‘달팽이골’이라야 해야지 어째서 ‘벗밭’으로 훌쩍 건너뛰었는지 모르겠다.

벗밭.jpg

내 보기에 마을 이름 유래를 풀 실마리는 소 우(牛) 자를 쓴 ‘우전(牛田)’에 있다. 땅이름에서 ‘소(牛)’는 집에서 기르던 집짐승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소·쇠·쇄·새·솔’ 같은 소리를 빌려 적은 글자로 볼 때 땅이름과 훨씬 잘 들어맞는다. ‘우전(牛田)’을 곧이곧대로 풀면 ‘소밭’이나 ‘쇠밭’이 되지만, ‘새밭’을 한자로 옮긴 땅이름으로 볼 여지도 충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정선읍 신월리와 남면 낙동리 사이에 고개가 있다. 지금은 고개 아래로 굴을 파서 편하게 지나다니지만 옛사람들은 ‘쇄재’로 넘나들었다. 이 고개를 가리키는 이름은 열 손가락을 다 꼽을 만큼 많다. 지금 쓰는 ‘쇄재’ 말고도 새재, 소재, 쇠재, 쇄령, 쇄운치, 서운치, 우와령(牛臥嶺), 심지어 철치(鐵峙)까지 이른다. 사이를 가리키는 ‘새’를 듣고 싶은 대로 받아적었기 때문이다.

정선군 남면 무릉리 능전 북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인 ‘쇠골’도 마찬가지다. 이곳에는 한때 동남광산이 있어 큰 마을을 이루었지만, 마을 이름은 쇠가 난다는 뜻이 아니라 ‘샛골’에서 말미암았다. 벗밭 서쪽에 있는 금곡(金谷, 조선지형도 참조)도 본디 ‘사잇골’이었는데, 이를 ‘쇠골’이라고 했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금속인 ‘쇠’로 둔갑시켜 셈이다. 이런 보기는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자,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벗밭의 말밑은 ‘사이 밭’을 뜻하는 ‘새밭’으로 볼 때 자연스럽게 풀린다. 마을은 “앞산인 가리왕산과 왼쪽에 있는 백석봉, 뒷산인 말미봉이 병풍처럼 에워”싼 곳에 있다. 산 사이에 있는 밭, 곧 ‘새밭’을 ‘쇠밭’으로 엇듣고 ‘우전(牛田)’으로 썼고, 와우(蝸牛)형 같은 풍수지리설이 슬몃 보태진다. 그런데 다시 ‘우전(牛田)’을 벗 우(友) 자를 쓴 ‘우전(友田)’으로 잘못 받아적으면서 아주 다른 길로 간다. 우(友) 자를 배달말 ‘벗’으로 뒤쳐 ‘벗밭’으로 되지 않았나 싶다. 배달말 땅이름이 한자식으로 바뀌었다가 아주 다른 뜻이 담긴 배달말 땅이름으로 돌아온, 매우 보기 드문 예라고 하겠다.


배달말 한입 더

벗집 벗 따위의 소금 굽는 시설을 하여 놓은 집.≒벗, 소금막

벗걸다 염전에 소금 굽는 가마를 설치하다.

벗트다 서로 쓰던 높임말을 쓰지 않고 스스럼없이 터놓고 지내기 시작하다.

벗하다 [1] 벗으로 지내다. 벗으로 삼다 [2] 서로 높임말을 쓰지 않고 허물없이 사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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