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138)
정선군 화암면 석곡리에 억실 마을이 있다. ‘억실’은 ‘억곡’이라고도 했다.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 되는 곳으로 정선 땅에서는 드물게 논농사를 지었다. 예전엔 대동국민학교(석곡리 380, 폐교)가 있을 만큼 제법 큰 마을이었다. 마을 이름 ‘억실’이 어디서 왔는지 말밑을 이리저리 찾아도 없다. 그나마 정선교육지원청에서 낸 지역화 교재인 ≪정선을 담다≫(2024, 98쪽)엔 다소 성의없이 유래를 말해놓았다.
석곡1리 중심 마을로 ‘억곡’이라고 한다. 억실은 어천을 끼고 토지가 비옥하여 논농사를 짓는 화암면의 대표적인 마을로 강릉 최씨 집성촌이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는 억실의 비옥한 토지 한가운데로 어천의 물길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신라 말 승려 도선이 “마을 어귀에 있는 돌담 위에 곳집(상여를 보관하는 집)을 지으면 물길이 자연스럽게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승려의 말대로 했더니 물길이 지금처럼 변하여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천’을 낀 마을이라서 ‘억곡’이라고 했다는 설도 전하지만 억지스럽다. ‘어천(魚川)’은 ‘앗내’나 ‘좀내’라고 했는데, 본디 냇줄기가 가늘고 작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마을 이름으로도 쓴다. 실제 어천 마을은 억실 마을에서 내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면 나온다.(※ 엇내와 좀내, ‘작음’을 품은 땅이름 참고)
땅이름은 경계가 없는 땅을 이쪽 저쪽으로 금을 긋는 일이다. 땅을 어떻게 보고 어떤 관계를 맺어갈지를 뜻매김하는 일이기도 하다. 땅이름은 그 땅을 어떤 마음으로 보았는지 되살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면 억실 마을이 어떤 곳에 있는가를 살피는 일은 이름 못지 않게 종요로운 일이다.
억실 마을 앉음새를 찬찬히 톺아보자. 마을 북쪽으로 송락봉(890m)과 취적봉(728.7m)과 취적봉(726m)과 박심치(697m)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느릿하게 남쪽으로 늘어져 내려오다가 후평(뒷드르)을 이루고 또 억실 앞뜰로 펼쳐진다. 마을 동쪽 오산(붕우산)에서 항산(행산, 809.2m)으로 다시 남으로 군의산(923.2m), 보리산(954m) 줄기가 이어지고, 그 아래로 어천이 서쪽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땅 모양으로 볼 때 골짜기 사이에 자리한 마을로, 느리골·느르골·너리골과 같은 배달말 땅이름이 있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어흘(於屹), 어라전(於羅田), 어치(於峙)에서 보듯 ‘느리골/느리실’ 따위를 한자로 받아적으면서 ‘어곡(於谷)’이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다시 소리 바꿈 과정에서 ‘엇곡/엇실’을 거쳐 오늘날 ‘억곡/억실’로 굳어졌을 수 있다. 이때 ‘실’은 골짜기나 마을을 가리키는 신라말 흔적으로, ‘골’과 뜻이 통한다. 요컨대, ‘억실’과 ‘억곡’은 어천을 낀 데서 말미암은 이름이라기보다, 골짜기 사이에 넓고 느릿하게 자리한 땅 모양을 반영한 이름이라고 하겠다.
배달말 한입 더
억실억실하다 얼굴 모양이나 생김새가 선이 굵고 시원시원하다.
걱실걱실하다 성질이 너그러워 말과 행동을 시원스럽게 하다.
온·즈믄·골·잘 배달말에서 큰 수를 가리키는 말은 대부분 한자말로 바뀌었다. 이미 ≪훈몽자회≫(1527)에서 “百 온 백 千 즈믄 쳔”에 이어 “萬 일만 만 億 억 억”으로 나온다. 한자 만(萬)은 전갈의 두 집게발과 몸과 꼬리를 본따서 지어낸 글자인데, 배달말로는 ‘골백번’에서 보듯 ‘골’이다. 억(億)은 사람 뜻은 1억 가지나 될 만큼 많다고 해서 지어낸 글자로 보는데, 배달말로는 ‘잘’이다. ‘골’과 ‘잘’은 최현배 주장인데 말밑은 흐리터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