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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움산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32) 쉰움산, 오십정산

by 이무완
산허리 돌 사이 우물이 쉰 개


쉰움산은 두타산 북동쪽에 솟은 봉우리로 해발 683미터에 이르는 나지막한 산이다.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미로면이 만나는 살피에 있는데 ‘오십정산’(五十井山)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쉰움산’이라고들 한다.

1908년 6월 18일치 ≪대한매일신보≫ 1면에 ‘쉰움산’을 소개한 기사가 있다.


두타산은 삼척군 서편 사십오리 허에 잇으니 그 산 위에 돌우물 쉰 개가 있는 고로 오십정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우물 위에 신당 하나가 있어 영험이 있다고 하여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며 가을 대에 기도하면 즉시 큰 비가 오는지라.


‘쉰움’은 움이 쉰 개라는 말이다. 움은 구멍을 가리키는 옛말 ‘구ᇚ’에서 왔다. 옛말에서는 구무, 굼기, 구모, 구메 따위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지역 말에서도 궁기, 구미, 구무처럼 여러 가지로 보인다.


터럭 구모마다 몯 광명을 폐사 삼쳔 대쳔 셰계 비최시니_≪지장경언해≫

여래ㅅ 모매 터럭 구무마다 방광샤_≪석보상절≫

내 모미 하 커 수물 굼기 업서_≪월인석보≫

(자, 랄, 하처럼 굵게 쓴 붉은 글자는 아래아(ㆍ)가 든 글자다.)


‘굼’에서 ‘ㄱ’이 떨어지면 ‘움’이 된다. 쉰움산 꼭대기에 있는 너럭바위를 보면 우묵하게 팬 데가 많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시달리면서 생겨난 구멍들이다. 쉰움산은 석회암 돌산으로 비바람에 바위가 움푹 패인 곳이 수두룩하다. 학교 다닐 때 이런 구멍이나 구덩이를 ‘나마’(gnamma)라고 배웠다. 비가 오면 크고 작은 구멍에 빗물이 고이는데, 실제 숫자는 쉰을 훨씬 넘는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산허리 돌 사이에 우물이 쉰 개나 되어 오십정이라고 한다. 크게 가물면 모두 마르고 한 우물만 마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고 적었다. 무엇보다 쉰움산은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으로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동해-쉰움산2_나마.jpg 쉰움산 정상에 보이는 물 웅덩이. 지리학에서는 나마라고 한다.
‘50’이 아니라 ‘샌’일 수도

우물(움)이 쉰 곳이라고 쉰움산이라고 했다는 설을 믿는 사람이 많지만 다른 목소리도 있다. 1964년 7월 21일치 ≪조선일보≫ 1면 <산 찾아 물 따라-관동순례 12>에서는 김상옥은 말밑을 달리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본다.


五十川(오십천)은 멀리 남쪽으로 牛甫峴(우보현)에서 오는 물인데, 마흔 일곱 번이나 건넌대서 「쉰내」라고 부른다지만, 저 頭陀山(두타산)을 우물이 쉰 군데나 있대서 五十井山(오십정산)이라고도 부른다는 것과 함께 그 이름의 유래를 달리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오십은 「쉰」이요, 그것은 「샌」의 음이 변해진 것일 따름. 이곳의 옛 이름인 悉直(실직), 史直(사직) 등과 함께, 모두 東方(동방), 曙光(서광), 黎明(여명) 등을 뜻하는 「시, 새, 샐, 샌」 등에서 그 이름의 본뜻을 더듬어야 할 것이어니와, 그것은 어찌 되었든, 오늘의 五十川(오십천)은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강임을 본다.(글쓴이: 김상옥)


김상옥은 ‘쉰’은 삼척의 옛 이름인 ‘실직’과 ‘사직’뿐만 아니라 ‘새’의 꾸밈꼴인 ‘샌’으로 보았다. 배달말에서 ‘새’는 ‘벽’, ‘별’, ‘바람(동부새)’ 같은 말에서 보듯 ‘동쪽’, ‘새롭다’, ‘밝다’, ‘처음’이라는 뜻과도 이어진다. 또 ‘사이’의 준말인 ‘새’로도 볼 수 있다. [새]라는 소리는 [시/쉬/쇠] 같은 소리와도 어금지금하다.


돌 사이 움 많은 산? 움이 많은 동쪽 산?


김상옥은 ‘실직’과 ‘사직’, ‘쉰움산’이 모두 ‘새’에서 온 말로 보았다. 그렇다면 삼척이라는 땅이름과 관련하여 ≪삼척군지≫(심의승, 1916)와 ≪삼척향토지≫(김정경, 1955) 설명을 보자.


▪ ‘실직>시젹’을 거쳐 ‘삼척’이 되었다._(삼척군지)

▪ 삼척(三陟)은 원래 실직(실직, 솃쩍, 스이쳑)을 한자의 음독(音讀) 상으로 고쳐 쓴 것이다._(삼척향토지)


≪계림유사≫(손목, 12세기 무렵)에 ‘삼(三)은 술 주(酒)와 하인 시(廝)를 반절로 소리낸다(三曰酒廝乃切)’고 나온다. 반절은 두 글자 부분을 따서 소리를 받아적는 방법이다. 한자 실(悉)과 사(史)를 중국말로는 각각 [xì], [shì]로 소리낸다. 우리 귀에는 [시이]처럼 들린다. 김상옥(1964)과 심의승(1916), 김정경(1955)의 주장을 간추리면 ‘쉰’은 [샌]을 받아적은 소리라고 하겠다. 이를 바탕으로 ‘쉰움산’의 말밑을 다시 톺아보면 ‘새(샌)+굼(움)+산’이 된다. 동쪽(≓새)에 구멍(≓굼)이 많은 산이나 돌 사이에 구멍이 많은 산으로 해석해 볼 만한 여지도 있다. 돌 사이 굼이 많다는 말은 그렇다손 쳐도 동쪽에 구멍이 많은 산이라고 했을 때는 자연스레 어디의 동쪽이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때는 삼척의 어머니산이자 태백산맥 주봉인 두타산(1353미터)에서 볼 때 쉰움산은 동북 방향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동해-쉰움산1.jpg ≪조선지형도≫에서 보는 쉰움산과 두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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