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41) 오리진, 오이진, 묵진, 묵호
[일러두기] ‘감’처럼 붉고 굵은 글씨는 아래아를 홀소리로 쓴 글자임.
세상의 풍속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말의 실제 뜻이 사라져 잘못된 오류를 답습하고 있는데도 습관에 젖어 그 잘못을 살피지 못한다.
정약용이 ≪아언각비≫(정약용 지음, 박상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21, 6쪽)에서 한 말이다. 땅이름이라고 다를까. 앞사람이 한 말을 뒷사람이 살피지 않고 그대로 따른 까닭에 본디 말밑이 흐리터분해진 땅이름이 수두룩하다. 내 보기에 ‘묵호’라는 이름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묵호’는 동해시에 있다. 옛 기록을 보면, ≪성종실록≫(1472년)에 강릉 우계현 ‘오이진(梧耳津)’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성종 12년, 1481년)에 “우계현 남쪽 30리에 ‘오진’(梧津)이 있다”고 나온다. 그뒤 ≪여지도서≫에 ‘묵진(墨津)’으로 나오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낸 ≪조선지형도≫(1913)엔 ‘묵호(墨湖)’, ≪조선지지자료≫(1914)에 한자로 ‘묵호진’을 쓰고 한글로 ‘먹호진’이라고 적었다. ≪한국의 지명유래집(중부편)≫(2008)은 옛날 묵호에는 까마귀가 많아 까마귀 오(烏)자를 써서 까마귀(烏)가 많은 마을(里) 나루(津)라는 뜻으로 ‘오리진(烏里津)’이라 했는데, 강릉부사 이유응(李儒膺, 1860~1861)이 와 보니 물빛도 검고 까마귀도 많아 검을 묵(墨) 자를 써서 ‘묵호’라 했다고 전한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요컨대, ‘오이진→ 오진→ 묵진→ 묵호’처럼 바뀌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오이(梧耳)=오(梧)=묵(墨)=오(烏):진(津)=호(湖)’와 같은 대응으로 볼 수 있다. ‘호(湖)’는 늪이나 못보다 넓고 큰 ‘호수’가 아니라 바닷가나 물가를 뜻하는 말로 보면 ‘진(津)’하고 뜻이 통한다. 문제는 앞엣말 ‘오이(梧耳), 오(梧), 묵(墨), 오리(烏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쟁점이 될 텐데 하나씩 말밑을 톺아보겠다.
조선 세종 이전엔 배달말을 받아적을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한자로 쓸 수밖에 없었다. 한자는 뜻으로, 소리로, 뜻소리로 받아썼다. 그래서 ‘오’는 곧잘 오동나무 ‘오’(梧)나 까마귀 ‘오’(烏)로 적고는 오동나무가 많은 곳이라서, 까마귀가 많은 곳이라서, 까마귀처럼 검어서 따위 이야기를 건다. 실제로 까마귀가 많았을 수 있다. 우리 땅에서 흔히 보는 까마귀는 큰부리까마귀와 까마귀다. 큰부리까마귀는 숲을 좋아하고 논밭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큰부리까마귀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텃새로 서너 마리씩 무리지어 산다. 까마귀는 대체로 훤히 트인 논밭이나 냇가에 많다. 이들은 무리지어 살지 않고 나름 텃세를 존중하면서 거리를 두고 살아간다. 다만 겨울 철새로 지나는 떼까마귀가 있다. 이들은 몸집이 작고 무리지어 주로 논밭으로 숲으로 다닌다. 이런 까닭으로, 까마귀가 흔한 곳이라서 생겨난 땅이름이란 설명은 어딘가 모자란다. ≪강원일보≫(2023. 12. 22. 11면)도 비판 없이 그대로 따랐다.
묵호항은 예부터 고기잡이가 잘돼서 어부들이 던져주는 물고기를 얻으려고 온갖 새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싸움을 잘했던 까마귀가 하늘을 뒤덮었다고 전한다. 물과 바다가 검고 까마귀도 많아 검을 묵(墨) 자를 써서 묵호라 했다고 전해진다. 또 선비가 잘 난다고 전해 글과 묵을 뜻하는 한묵(翰墨)의 의미로 묵호라 지었다는 설도 있다.
백 걸음 물러나 생각해 봐도 어부들이 까마귀에게 물고기를 던져주었을까. 우리 정서로 볼 때 까마귀는 결코 반가운 새가 아니다. 먼 옛날, ≪삼국유사≫ 권1 <사금갑(射琴匣)> 조나 권5 <낭지승운보현수조(郎智乘雲普賢樹> 조, <연오랑세오녀> 설화에서 보듯 까마귀는 앞일을 알려주는 새로 여겼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삼국 시대를 지나 뒷날로 오면 까마귀나 까마귀 울음은 죽음이나 질병을 부르는 불길한 조짐으로 여겼다. 그렇잖아도 이런저런 금기가 많은 바닷가 사람들이 재수 없는 까마귀한테 물고기를 부러 던져주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빛이 검어서 ‘오(이)진’이나 ‘묵호(진)’라고 했다는 설명은 어떤가. 같은 바다인데 묵호 앞바다 물빛만 유독 더 검게 보였을까. 묵호항 뒤 바람의 언덕에 올라 바다를 한번 내려다 보면, 묵호항보다 도래 끝에서 어달 쪽으로 나가면서 물빛이 더 검게 보일 때가 많다. 내 보기에 ‘묵호’와 ‘검은 바다’라는 대응은 뒷날 무연탄을 실어내는 항구가 되면서 끌어다 붙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잘 알다시피 묵호항은 고기잡이 배가 머무는 자그마한 포구였으나 1936년 조선총독부가 무연탄 반출항으로 지정하여 1939년 삼척과 태백에서 캐낸 무연탄을 실어낼 철도를 놓으면서 동해안을 대표하는 항구가 된다. 조선총독부 통계로는 1944년까지 광산에서 묵호항까지 실어낸 무연탄이 98만 톤에 이른다. 자연히 묵호항역 들머리에 있던 저탄장과 석탄을 실어내는 컨베어벨트에서 날리는 탄가루는 온 동네를 시커멓게 했다. 1980년 초에 이르러 저탄장 지붕을 하면서 탄가루를 면할 수 있었다. 날리는 탄가루는 그야말로 먹빛 묵호로 생각하게끔 하는 데 한몫 단단히 했다.
그러나 묵호의 ‘묵(墨)’은 ‘검다’에서 생겨난 말일까. 마침 묵호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금진’(강릉시 옥계면)이 있다. ‘금진’의 옛 이름은 먹진, 흑진이다. ≪조선지지자료≫를 보면, ‘먹진/金津里’, ‘먹진가ᆡ/金津浦口’로 나오지만, ‘흑진(黑津)’이라고도 했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은 ‘금진항’의 이름 유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이 검고 개(津)가 있어 먹진(墨津) 또는 흑진(黑津)이라 했는데 1916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건남리(建南里)를 병합하여 금진이라 하였다. 마을 뒷산이 금(金)자처럼 생겨 금진이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실은 ‘검다’는 뜻의 음을 빌린 것이라고 한다.
‘먹진, 흑진, 금진’의 말밑을 거슬러 가면 ‘감’에 다다른다. 잘 알다시피 ‘감’은 ‘크다, 높다, 신성하다, 북쪽(뒤)’이라는 뜻이 품는다. 금진은 나루가 크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남은 건 오동나무와 얽힌 유래다. 오동나무의 옛 이름은 ‘머귀나ᇚ’이다. ≪훈몽자회≫(1527)에 ‘梧 머귀 오 桐 머귀 도ᇰ’로 적었고, 앞서 ≪월인석보≫(1459년)나 ≪분류두공부시언해≫(1481)도 ‘오동’을 각각 머귀, 머귀나ᇚ으로 적었다. ‘머귀’는 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먹+위’라고 한 데서 생겨난 말로 짐작한다. 우리는 오동나무와 벽오동을 싸잡아 ‘오동나무’라고 하지만 사실 둘은 아주 다른 나무다. 더구나 ‘벽오동’은 예부터 씨앗을 먹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자.
오동나무(梧桐나무) 현삼과의 낙엽 활엽 교목. 높이는 15미터 정도이며, 잎은 마주나고 넓은 심장 모양이다. (가운데 줄임) 재목은 가볍고 고우며 휘거나 트지 않아 거문고, 장롱, 나막신을 만들고 정원수로 재배한다.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남부 지방의 인가 근처에 분포한다.≒오동.
벽오동(碧梧桐) 벽오동과의 낙엽 활엽 교목. 높이는 15미터 정도이고 껍질은 녹색이며, 잎은 넓고 크며 끝은 손바닥 모양으로 세 갈래 또는 다섯 갈래로 갈라졌다. (가운데 줄임) 열매는 식용한다. 중국, 대만 등지가 원산지로 우리나라의 전라·경상 등지에서 재배한다.≒청동.
다만 머귀가 벽오동나무인지 오동나무인지는 흐리터분하다. 줄기에서 푸른 빛이 돈다 해서 푸를 벽(碧) 자를 쓴 벽오동 잎은 오동나무 잎과 생김새나 크기가 엇비슷하다. 그렇지만 넓은 잎 말고는 닮은 게 없는, 아주 딴 나무다. 그래서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잤더니’라는 노랫말에서 보듯, 태평성대를 바라며 벽오동을 심었지만, 오동은 키워 벨 요량으로 심었다. 더욱이 ‘머귀나무’라는 나무가 실제로 있는데 ‘오동나무’와는 아주 다른 나무다.
머귀나무 운향과의 낙엽 활엽 소교목. 줄기는 높이가 15미터 정도이고 가시가 많으며, 잎은 우상 복엽으로 긴 타원형이고 잔톱니가 있다. 5월에 누런 흰 꽃이 취산(聚繖) 화서로 피고 열매는 삭과(蒴果)로 11월에 익는다. 나무는 나막신 재료로 쓰고 열매는 약용한다. 따뜻한 해안 부근에 나는데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 분포한다. ≒식수유.
머귀나무는 3미터 남짓 자라는 산초나무를 잎이고 줄기고 키고 부풀린 듯한 나무다. 그렇다고 하면 오이(梧耳)나 오(梧)는 ‘머귀나무’나 ‘오동나무’라는 한자 뜻보다 [머귀/머기/먹]이라는 소리를 빌려적은 한자로 보아야 한다.
‘오리진’이나 ‘오이진’과 관련하여 ‘오리’나 ‘오리나무’와 관련지어 생각해봄직하다. 옛 기록에 나온 한자 뜻에 매달리다보면 본디 배달말 땅이름에서 멀어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땅이름이든 배달말 이름이 먼저 있고 그것에 밑돌 삼아 소리 빌기든 뜻 빌기든 글자로 받아적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 글자가 없던 때라면 어설프지만 한자로 받아적을 수밖에 없다.
‘오리진’이나 ‘오이진’이라는 소리만 보면 오리골, 오리말처럼 ‘오리’나 ‘오리나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더욱이 물가에 있는 마을이니 물새(오리)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조선지지자료≫(강원도 3)에 보면 비슷한 땅이름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오리나르/五里津(오리진) (강원 강릉 신리면 주문리)
오리꼴/梧耳洞(오이동) (강원 강릉 자가곡면 임곡리)
오리골/鳧洞(부동) (강원 영월 우변면)
오리숩골/鳧林谷(부림동) (강원 영월 우변면)
오리목골/鳧項洞(부항동) (강원 영월 우변면)
다만 ‘오리’가 말밑이라고 한다면 뜻으로 받아적을 때는 먹 묵(墨)이 아니라 오리 부(鳧)를 써야 하지만 그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다른 가정으로 ‘오리나무’를 생각해볼 수 있다. 흔히 옛사람들이 길가에 이정표 삼아 5리마다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오리나무가 되었다고 하지만 말재기들이 재미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옛기록 어디에도 역참 사이에 오 리마다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면 어떤 까닭으로 ‘오리나무’라는 이름을 얻었을까. ≪한국식물이름의 유래≫(조민제 외 편저, 심플라이프, 2021)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리나무라는 이름은 나무껍질이 세로로 잘게 갈라지는 모양이나 염색제로 사용할 때 나무껍질을 잘게 쪼개어 사용하는 것을 실, 나무, 대 따위의 가늘고 긴 조각을 뜻하는 ‘오리’에 빗대어 붙여진 것으로 추정한다.(438쪽)
오 리마다 있는 나무라서 오리나무가 아니다. 나무껍질을 잘게 쪼개서 실오리처럼 낼 수 있는 나무라서 ‘오리나무’가 되었다. 정리하면, 오리진(烏里津)은 물새인 오리나 오리나무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겠다.
오이진이나 오리진을 쓴 한자를 보면 오동나무 오(梧, 머귀 요) 자로도 쓰고 까마귀 오(烏)로도 썼다. 이들 한자는 애당초 오동나무나 까마귀하곤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오’는 ‘오동나무’나 ‘까마귀’라는 뜻이 아니라 [먹]이라는 소리를 적거나 ‘검다, 먹’이라는 뜻소리를 받아적은 글자로 봐야 한다. ‘먹’은 크다는 뜻으로 쓴 ‘검’에서 온 말인데, ‘검’의 말밑은 ‘감’이다. 다시 말해 크고 높고 신성하다는 뜻을 품은 ‘감’이 ‘검’으로 소리바꿈한 뒤 다시 ‘검정, 검다’의 말줄기인 ‘검-’으로 여겨 오(梧․머귀), 오(烏․검다), 묵(墨․먹)으로 적으면서 오이진, 오리진, 묵진, 묵호 같은 땅이름들이 생겨난 셈이다. 어디 묵호뿐이랴. 강릉 옥계면 금진리의 ‘먹진(墨津)’이나 정선 남면 무릉리의 ‘묵산(墨山)’도 모두 ‘크다’는 뜻으로 지어낸 땅이름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