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골, 고단한 이들이 따개비처럼 살던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50) 논골, 논산, 논현

by 이무완

논이 없는 논골

동해시 묵호동에 논골이 있다. 바다 쪽으로 쭉 내민 언덕배기에 마당도 없이 지붕 낮은 집들이 따개비처럼 붙어 앉은 마을이다. 논골담길 벽화마을로 이름이 나면서 제법 관광객으로 찾는 곳인데, 암만 둘러봐도 다랑논 한 뙈기 없다. 그런데 어째서 논골인가 하면서 고개를 삐끗 꼬곤 한다.

전하는 말은 이렇다. 1941년 개항한 묵호항은 1960~1980년대에 고기잡이로 크게 북적인다. 오징어고 명태고 그야말로 ‘개락’으로 잡혔다. 앞바다는 집어등을 대낮처럼 환히 밝히고 밤새 고기를 잡았다. 아침마다 이곳 사람들은 묵호항 뒤편 언덕에 볕 좋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덕장을 매고 고기를 널어 말렸다. 지게와 고무대야로, 수레로 쉴 새 없이 고기를 이고 지고 실어 나르면서 물이 끊임없이 철철 흘러 ‘묵호에선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 할 만큼 길바닥은 늘 논바닥처럼 질척거렸다고. ≪강원일보≫(2023. 12. 22. 11면) 설명도 별 다르지 않다.


묵호항의 전성기 당시, 아랫마을에는 뱃사람들이 주로 살았고 윗마을에는 명태를 말리는 덕장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항구에서부터 덕장이 있는 마을 꼭대기까지 명태를 옮기려면 구석구석 이어진 좁은 흙길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 때문에 골목길은 늘 질퍽질퍽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논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시인 이동순은 당시 이곳 아침 풍경을 이렇게 썼다.


길가엔/ 온통 질퍽이는 흙더미/ 비스듬히 나려 앉은/ 판잣집 언덕길엔 바람 속에 홀로 밤새운 미끄럼 방지 팻말/ 그 앞으로 타다 남은 연탄재 (……) 비는 나리고/ 아침 등교 길의 묵호/ 고단한 세월은 추적추적 진창이 되어/ 노란 장화바닥에서 질척이는데/ 내 발걸음/ 왜 이렇게 더디기만 한가 (이동순의 시 <아침 묵호> 부분)


이동순이 ‘논골’을 마음에 두고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어슷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묵호덕장 오르는 길, 1970년대 (사진: 동해시 역동의 기억, 158쪽)

논골은 서쪽 창호초등학교 뒤에 있는 오학산(215.7미터) 줄기가 동쪽 쑥밭등으로 부드럽게 늘어지며 흐르다 묵호주공아파트 앞까지 와서 남쪽으로 머리를 돌려 묵호항 뒤편까지 이어지다가 뚝 끊어진 데에 있다. 그 끄트머리에 묵호등대(67미터)가 지금도 우뚝 서 있다. 이 산자락 비탈을 따라 엉덩이도 못 돌려 댈 만큼 다닥다닥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생겨난다. 골목에서 사람을 만나면 한 사람이 비켜서야 할 만큼 솔고 지붕도 낮았다. 비 오면 빗물이 흘렀고 집집이 허드렛물이 그대로 흘렀다. 게다가 산만댕이 덕장까지 철럭대며 생선을 이고 지고 날랐으니 좁다란 골목길은 곧잘 진펄이 되고 말고다. 그래서 논골이 되었다는 설명인데 나름 고개 끄덕여진다.

묵호 덕장의 부녀자들, 1960년대 (사진: 동해시 역동의 기억, 240쪽). 뒤쪽에 묵호등대가 보인다.

산줄기 늘어진 곳에 있는 마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산줄기가 느릿하게 늘어진 곳이라고 해서 ‘늘골(늘+골)’이나 ‘는골’이라고 하다가 ‘는골>능골>논골’로 소리바꿈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우리 땅은 산이 많고 자연히 산줄기가 들이나 바다로 늘어진 데가 많다. 그 흔적들이 늘뫼, 논산(論山), 논현(論峴), 늘어진 산인 어달(於達), 늘어진 마을인 어리(於里), 길게 늘어진 고개인 느랏재, 느릅재 같은 땅이름으로 남았다. 충남 논산은 ‘논미’라는 땅이름에서 말미암았다. 논미는 늘어진 뫼인 ‘논뫼’로 볼 수 있다. 처음엔 늘어진 뫼라고 해서 ‘늘뫼’라고 하다가 ‘늘미→ 는미→ 논미’로 된 다음 한자로 적으면서 논산(論山)이 된다. 잘 알다시피 논산은 옛 백제 땅으로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이 황산벌에서 결전을 벌인 황산벌이 있다. 황산은 누를 황(黃), 뫼 산(山)으로 쓴다. 누른뫼, 곧 ‘늘은 뫼’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황산은 고려 시대에 와서 연산(連山)으로 이름을 바꾼다. 연산의 ‘연(連)’은 ‘이어진다’는 말인데, 산줄기가 늘어지듯 이어진 곳임을 나타낸다. 서울에 있는 논현도 ‘논고개’로 늘어진 고개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학산에 이어진 어달산만 해도 봐도 그렇다. 어달은 늘 어(於) 자, 다다를 달(達) 자를 쓴다. 달은 고구려말 흔적으로 산을 뜻한다. 어달은 산줄기가 늘어진 산이다. 물론 이 말도 정말 그런가는 기록으로 남은 게 없으니 확인할 길은 없다.

땅이름에는 알게모르게 마음이 담기고 손때가 묻는다. 삶에서 배어나온 말이 꾸밈 없이 새겨진다. 길바닥이 질어서 ‘논골’이 되었다는 해석도 그럴싸하지만 늘어지듯 흘러온 산줄기에 따개비처럼 앉은 집들은 온전히 살피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다.

초록봉에서 본 논골담길이 있는 묵호항 일대.

배달말 한입 더

개락 지역말이다. 넘치도록 많은 상태. 더러 ‘홍수’를 가리키는 말로 쓰기도 하지만 홍수를 가리키는 한자말은 ‘포락(浦落)’이라고 했다. 논이나 밭 따위가 물에 스쳐 떨어져 나감을 뜻한다.

진컬/진클 지역말이다. 땅이 질어서 늘 질퍽질퍽하게 된 곳. 표준어로는 진창이다.

진쿠렁 움푹해서 물이 질척거리는 곳. 표준어는 진구렁이다.

진펄 땅이 질어 질퍽한 벌. 백석이 쓴 시 <가즈랑집>에 보면, “토끼도 살이 올은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 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딸으며”라는 대목이 있다. 여기에 ‘아르대즘퍼리’는 아래쪽에 있는 진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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