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소, 두 물줄기가 어우러지는 자리

땅이름으로 배우는 배달말(58) 파소, 팥소, 피소, 파소굼이, 파수천

by 이무완

‘파소’는 무릉계곡과 백봉령에서 흘러내린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있는 소(沼)였다. 지금 그 자리엔 쌍용씨엔이 동해공장 집수정이 있다. 예전에 매우 크고 깊은 소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상류에서 흘러든 자갈과 모래로 메워져 옛 모습을 짐작하기 어렵다.


피가 내를 이뤄 흐르다

땅이름에는 장소와 시간과 사람이 들어있다. 무엇보다 사람이 빠진 땅이름은 있을 수 없다. 자연히 이름이 있는 땅에는 이야기가 깃들기 마련이다. ‘파소’에도 이야기가 있다. 시대 배경은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간다.

1592년,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동해ㆍ삼척까지 올라온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사람들은 서둘러 두타산성으로 숨는데 그 수가 2천에 이르렀다. 왜구는 무릉계곡을 거슬러 올라와 산성을 치려고 했지만 산세가 가파르고 거친 데다 산길을 모르니 오래도록 산성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고할미가 ‘파소’에서 빨래를 하다가 혀를 끌끌 차면서 “이기령과 중봉을 넘어와 뒤를 치면 되는데…….” 하고 두타산성 뒷길을 알려주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이때 숨진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피가 내를 이뤄 흘렀고 파소를 시뻘겋게 물들였는데, 물빛이 팥빛과 같았다고 해서 ‘팥소’(豆淵․두연)라고 했다고 한다. 그뒤 ‘ㅌ’이 떨어져 나가면서 ‘파소’가 되었다고. 앞 이야기는 같은데 두타산성에서 흘러내린 피가 파소에 이르는데 ‘피로 물든 소’라서 ‘피소’라고 하다가 ‘파소’(巴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까닭은 찾을 수 없다. 이때 화살도 끝도 없이 내를 따라 흘러 내려와 내 이름도 화살 ‘전’(箭) 자를 쓴 ‘전천’이 되었다고 하는데, 썩 믿을 만한 말은 아니다.

이들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해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무엇보다 ‘파소’를 쓴 한자를 보면, ‘땅이름이나 큰 뱀’을 뜻하는 ‘파’(巴)다. 흔히 용이 하늘로 오른 소라서 ‘용소’라고 하고 이무기가 살던 소라서 ‘뱀소’라고 하고, 처녀가 빠져 죽은 소라서 ‘처녀소’라고 이름 붙이던 버릇이 기대어 보면 ‘파소’는 ‘큰 뱀이 살던 소’라고 해야 할 듯한데, 그런 이야기는 아예 없다. 또 핏빛으로 물든 소라고 하면 ‘핏소’나 ‘혈소’(血沼)라는 이름이 더 자연스러울텐데 이런 이름 짓기에서도 벗어난다.

더욱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5년 전인 1577년 삼척부사 김효원은 3월 20일부터 26일까지 무릉계를 탐방하고 남긴 ≪미수기언≫ <두타산기>(1662)에 ‘파소’와 관련한 대목이 있다.


전천에 이르니 마을 어른 대여섯이 찾아와서 같이 이야기 나누었는데 박세호와 최극명이 따라가겠다고 하여 모두 나란히 걸어갔다. 혈담을 지나 상평을 거슬러 올라가니(至箭川。鄕長五六人來與語。朴君世豪。崔君克明願從之。於是。聯袂行行。過血潭。遡橡坪。)


이 기록으로 보면 이미 1592년 전부터 ‘혈담’과 ‘전천’이란 말을 썼다는 말이 된다. 물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썼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혈담’이 아니라 ‘두연’이나 ‘파소’라고 적어야 아귀가 들어맞는다.

파소.jpg 파소와 파소굼이 (지도출처: 조선지형도, 1917)

갈라지는 곳은 곧 어우러지는 곳이다

‘파소’의 이름 유래를 풀어갈 또 다른 실마리는 ‘파수천’(派水川)이라는 이름 자체에 있다. ≪동해시 지명지≫(2017)에 “이 일대의 내를 가리켜 派水川(파수천)으로 적기도 하였다”(187쪽)는 대목이 있다. 흔히 두 물줄기가 모이는 곳을 가리켜 ‘두물머리’(양평), ‘아우내’(병천), ‘아우라지’(정선)라고 한다. 두물머리는 두 물이 만나 한강으로 나아가는 들머리고, 아우내는 두 물줄기가 아우러지는 내고, 정선 아우라지는 골지천과 송천이 어우러지는 자리다.

그런데 물줄기가 모이는 곳은 상류 쪽을 거슬러 치올려 보면 둘로 물줄기가 갈라지는 곳이다. 자리는 같지만 같은 자리가 아니다. 냇줄기가 흘러갈 쪽을 보면 하나로 어우러지는 곳이지만 냇줄기가 흘러온 쪽을 보면 두 갈래로 나뉘는 곳이다. ‘파수천’의 ‘파(派)’는 ‘물갈래, 강물이 갈려서 흘러내리는 가닥, 갈라져 나온 계통, 갈라져 흐르다’로 새긴다. 파소 옆에 있는 삼화초등학교 교가에서 “파수목에 우뚝 솟은 배움의 전당”이라는 노랫말을 보았다. ‘파수목’은 물길이 갈라지는 목이다. ‘파수굼이’는 애초 ‘파소’에서 온 말이 아니라 물이 갈라지는 곳이라서 붙은 이름일 수 있다. 이때 ‘굼이’는 ‘구ᇚ’에서 생겨난 말로 구멍은 두말할 것도 없고 움푹한 곳(굴, 골짜기)이나 물이 흘러가다가 움푹하게 패인 안쪽을 말한다. 파수굼이를 살피로 해서 안쪽을 ‘파수안’, 바깥쪽을 ‘파수밖’이라는 땅이름들이 생겨났다. 파수굼이를 ‘피수굼이’라고도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파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파소’는 ‘파수굼이에 있는 소’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임진왜란 때 두타산성 이야기를 섞고, ‘파’와 비슷한 ‘피’와 ‘팥’ 소리에 이끌리면서 ‘피소’나 ‘팥소’ 같은 이름을 지어내고 한자쓰기를 좋아하는 윤똑똑이들이 ‘혈담(血潭)’나 ‘두연(豆淵)’을 또 지어냈으리라.

파소001.JPG 파소와 파소굼이

덧말

남극 세종과학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에 아우라지계곡(Auraji Valley)이 있다. 두 갈래로 난 계곡이 만나 바닷가로 흘러내려오는 모양새가 정선 아우라지를 닮았다 하여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제안하여 2012년 남극지명사전(CGA)에 올렸다. 아우라지계곡 말고도 백두봉, 촛대바위, 인수봉, 세석평원, 미리내빙하, 울산바위봉 같은 우리 말로 된 이름들이 남극에 있다.

한국일보 20120704 11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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