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주하는 인간’이다
“그렇게만 살면 되는 거야.”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정해진 루트를 따라 안정된 직장, 명함이 있는 삶, 남들이 부러워하는 조건을 갖췄다면 성공한 거라고.
그런데 문득,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정말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남들이 보기엔 좋은 삶.
하지만 내 눈엔 그저 “그 정도면 괜찮지” 싶은 삶.
그건 만족일까, 아니면 체념에 가까운 타협일까.
직장은 일을 하는 공간이다.
경험이 쌓이면 효율도 오르고, 기술도 늘어난다.
하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개인성장은 별개로 남는다.
직장은 ‘외적 역할’이고,
직업은 ‘내면의 가치’다.
내 가치는 직장이란 보호막 안에서 드러날 수 있지만,
그 껍질을 벗겼을 때 남는 건 직책도, 계급도 아닌 나 자신이다.
그때 드러나는 진짜 ‘나’는 무엇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권한과 시스템 뒤에 숨어 있던 나는,
과연 스스로 서 있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공무원 조직은 규율과 안정 위에 존재한다.
통일성은 질서를 만들고, 다양성은 발전을 이끈다.
그 둘이 균형을 이뤄야 조직은 살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다양성은 종종 귀찮은 잡음으로 취급되고,
순응은 미덕이자 생존 전략이 된다.
지시를 잘 따르는 자가 ‘무난한 인재’로 간주되고,
생각을 말하는 자는 ‘부조화의 상징’으로 낙인찍힌다.
군은 그 문화가 특히 강하다.
위계질서와 계급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질서가 비판 없는 복종으로만 유지될 때,
그 조직은 생기를 잃는다.
나는 묻고 싶다.
미국 군대의 창의성과 NATO의 유연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말 잘 듣는 병사’가 아니라,
판단하고 책임지는 병사에서 나온다.
시대는 변했다.
독립변수가 달라졌다면, 종속변수도 변해야 한다.
문화는 시대의 함수를 따라야 살아남는다.
나는 깨달았다.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지 못하는 건,
불안해서가 아니라 질문을 멈췄기 때문이라는 걸.
인간은 원래 이주하는 존재다.
생각도, 직업도, 꿈도
하나에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란다.
그런데 우리는 정착을 ‘성공’이라 부르고,
이동과 변화는 ‘불안정’이라 낙인찍는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잊고 있었다.
나는 다시 이동하기로 했다.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사고의 이주, 가치의 이주, 태도의 이주.
생각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질문하는 인간이다.
그것이 나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나는 정해진 루트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길을 바꾸는 ‘이주하는 인간’이다.
이 글은 단지 하나의 고백이자,
질문을 품은 사람에게 보내는 짧은 신호다.
그저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그 질문 하나에 오래 머물러본 기록이다.
세상이 정해준 틀 안에서
나를 맞춰 살아가는 것보다,
스스로 나의 좌표를 찾아나가는 일이
조금 더 불편하지만
조금 더 인간답다고 믿는다.
당신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함께 생각해 보자.
지금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인가,
아니면 그냥 주어진 길을 걷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모두
정착과 이주 사이를 오가는 존재다.
그저 버텨온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자리 위에 선 나 자신을 위해,
지금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정말 내가 선택한 길인가?”
그 질문 하나로,
삶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우리 모두를 진짜 ‘나’에게 데려다줄 것이다.
정해진 루트를 걷는 삶.
그 길을 택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이주하는 인간’이고 싶다.
움직이고, 탐색하고, 선택하는 존재.
내가 빛나는 순간은
조직의 방패 안에서가 아니라,
내가 세운 기준과 가치 위에 설 때다.
순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