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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퍼민트 Apr 26. 2023

둥지

옛 집들의 기억을 더듬다

1. **도 **시 **읍 **로 **아파트 ***동 ***호

   직장 선배의 병문안을 가는 길, 활자 중독증에 걸린 사람 마냥 간판을 읽고 전봇대의 홍보글도 읽어본다. 진지하게 내 시선이 한참 머무른 곳, 부동산 유리창에 붙은 매물광고. 설마 하며 눈을 비비고 다시 보지만, 광고 속의 숫자는 정확히 우리 아파트 매물가의 10배이다. 서울, 그중에서도 압구정...뉴스에서 접했을 땐 그저 나와 관계없는 숫자들이라 여겼는데 막상 눈앞에서 이 숫자들을 마주하니 내가 너무 먼 곳에서 동떨어져 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허허허

   그 동떨어진 세상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어 오랫동안 구석구석에 배인 우리 가족의 숨 내음을 맡으니 드디어 내가 가장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왔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집에 무슨 인격이 있겠냐만, 이 작은 공간만큼은 우리 가족을 안전히 지켜주고 우리와의 의리를 지켜나갈 거란 믿음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오늘도 웃고 울고 짝꿍, 그리고 딸아이와 티격태격하는 일상을 즐긴다.

 

2. 강원도 **군 **읍 **리 **전자

  세상의 중심지라 여겼었다. 강원도 **군 **읍이... 그리고 그 시장 한복판에 있는 전자대리점 하나가 세상에서 제일로 유능한 기술자가 운영하는 최고의 가게인 줄로 알았던 것은, 내가 어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만큼 시골에서 바깥세상을 접할 일이 드물어 순진했기 때문일까?

   그런 자랑스러운 부모님의 가게가 읍내 중앙에 딱 버티고 있었기에 뒤에 자그마하게 마련해놓은 월세 살림집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중풍에 걸린 할머니와 두 동생들과 한 방에서 지내야 했고 욕실이 없어 주방 한쪽에서 물을 데워 썼지만 마냥 행복했다. 여름이면 열두 가구 공용 수돗가에서 물을 받아놓고 목욕을 했고 이  방, 저 방서 각 가구의 아이들이 모여들면 수영장이 따로 없었다.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담임 선생님께 우리 가게에 가서 차 한잔 하시라며 넉살 좋게 손잡아 이끌었던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가게에 자그마하게 마련된 부모님의 방에서 엄마가 부스스하게 나오셨을 때도 난 그저 우리 가게 자랑에 여념이 없었던 듯하다. 당시 가게를 지키고 있던 아저씨가 새로 오신 우리 가게의 월급 기사님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이 떠날 때까지 기다려주신 새로운 주인이라는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냉커피를 선생님 앞에 내밀며 주인이 아닌데 주인인 척해야 했던 엄마의 난처함도 그 당시엔 알 턱이 없었다.

  이후, 어린 맘에도 몸 하나 뉘일 곳을 걱정해야 했었다. 재래식 화장실과 멀찍이 떨어진 방 한 칸을 꿈꾸는 시간들이 운명인 양 기다리고 있었다.


3. 강원도 **군 **읍 **리 ??번지

 예의 그 전자대리점에서 더 이상 우리 가족이 머물 수 없게 된 이후, 나의 소녀 시절의 일기는  더 이상 열악할 수 없을 정도의 장소를 배경으로 쓰여졌다. 재래식 화장실과 한껏 가까워진 방, 그리고 한 대문 안에서의 주인집과의 부담스러운 공존... 이런 현실은, 매일 밤 꿈속에서 사춘기 소녀를 작은 시골집으로 이끌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바쁜 부모님과 떨어져 조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시골집.

   벽의 황토 내음이 그윽한 곳, 돌로 만든 야트막한 담장,    침입자로부터의 보안 기능은 처음부터 아예 고려되지 않은 싸리 대문, 널찍한 대청마루, 그리고 아궁이와 곤로가 공존했던 정겨운 부엌...전통적인 한옥 양식에서 벗어났지만 made by 우리 할아버지인, 정성이 담긴 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혼자 남으신 몇 년 동안도  난 그 집과 함께였다. 유치원에 다녀야 해서 부모님이 계신 시내로 나와 살 때도 주말마다 시내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가서 하룻밤을 보내곤 했었다. 어린  아이를 시내버스에 태운 후 그 작은 발 앞에 엄마는 과일이며 시어머니 간식거리들을 챙긴 보따리를 놓았다. 그리고 기사 아저씨께 당부의 말씀을 건네고 돌아서면 어린 계집아이의 싸리 대문 집으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얼마 안 되어 할머니가 읍내로 나와 우리 가게 뒤의 작은 월세방에서 우리 세 자매와 생활하게 되면서 그  여정은 끝이 났다. 부모님이 헐값에 그 집을 팔았다는 것만 알았을 뿐, 오랫동안 꿈에서만 버스를 타고 방문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그 아이가 엄마의 고향을 궁금해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그곳을 찾았다. 담은 허물리고 그곳에 다른 집이 세워졌을  것이 뻔했지만,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싸리 대문 집이 세월을 받아내고 있어 주기를,  그런 기적이 존재하길 기대하며 발길을 옮겼다. 시골 어르신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던 방앗간, 존재 자체로 조그만 계집 아일 위협했던 서낭당, 혼자여도 씩씩하셨던 낭규 할아버지 집, 할아버지랑 거닐던 애기똥풀 가득한 시냇가... 기억 속 모습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어디에도 돌담집은 없다. 황토 내음 그득했던 정겨운 흙집은 없다. 게다가 그 집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곳에 집이 두 채나 들어섰다. 대추나무 뒤편에 있었는데 이제 보니 대추나무가 여러 그루다.  그 자리만  자꾸 맴도는 나를 남편이 잡아 이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돌아오는 내내 싸리 대문 집이 그립다.


4. **도 **시 **읍 **로   **아파트 **동 **호

   결혼 후 젊은 시절, 집의 소유가 내겐 큰 의미가 없었다.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고생했던 사춘기 시절의 기억은, 집의 소유 그 자체보다는 쾌적하고 안락한 공간에서의 생활에 더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신경 쓰게 되는 각종 문제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맘 편하게 누군가의 집을 빌려 살며 평생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싶었다. 불가피하게 은행  도움을 받아 꼬박꼬박 내야 하는 이자도 억울했다. 제법 일찍 집을 샀었지만 곧 팔아버린 것도 그런 철없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내 아이가 커감에 따라 안정적으로 한 곳에 정착하고 싶어 졌고 이 아이가 커서도 한 곳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느티나무 같은 엄마이고 싶었다. 그래서 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매체들이 전하는 집에 관한 얘기는, 온통 숫자로 점철된 정보뿐이다. 금액의 오르내림, 그뿐이다. 집과 관련해 초등학생들도 몇 평이냐를 묻는 질문을 한다지. 이런 현실 속에서도, 난 내 아이에게 이 집이 꿈에서도 찾는 정겨운 집, 허름해도 부모님이 살고 있기에 세상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집이었으면 하는 시대착오적 욕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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