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남녀가 만나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면 방귀도 트고 지갑도 트고 배꼽도 튼다더라. 우리 사이는 뭐, 안 쓰면 그만인 사이니까 말이라도 트고 지내는 게 어때? 괜찮지?
요즘 브런치에서 어디 다녀오면 후기를 꼭 쓰는 게 예의인 것 같더라. 이 핑여사가 개털 된 지는 오래지만 의리는 살아있는 여자잖아.
그래서 후기를 쓰기로 했어.
핑여사가 일 년에 딱 두 번(부처님 오신 날, 팥죽 먹는 날) 절에 발걸음을 한다고 했잖아. 올해도 절에 가야겠다고 나섰는데 하필 부처님 오신 날인 거야.훗훗.
작년엔 가나사부터 들렀으니, 올해는 마바사부터 먼저 올라갔지. 그래야 절 사람들이 몰라보거든. 절에는 이무기 닮은 보살들이 몇이 있는데, 같은 곳으로 계속 가다 보면 용케 나를 알아보고서는 뒤에다 대고 노래를 부르더라고.
'얼씨구씨구 들어간다~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핑여사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암튼 올해에도 야심 차게 큰 가방에다절복바지 챙겨 입고일찍 마바사부터 들렀지.
일찍 일어난 새가 밥도 잘 먹는다? 는 속담도 있잖아. 도시락 싸주는 척하면서 몇 개 슬쩍하고, 김밥도 서너 열개 챙겼어.봉사자들 먹으라고 박카스도 내놨는데, 야무지게 두 개 챙겼지. 올해는 절에 오시는 신도님들을 위해 큰 보온 물통옆에 커피믹스, 율무차, 둥굴레차를 수북이 쌓아놓았더라고.
난 믹스 커피를 돈 주고 사 먹는 게 제일 아까워죽겠더라. 왜 그딴 걸 돈 주고 사 먹어?
여기에 이렇게 수북이 쌓여있고만. 그래서 아무도 안 볼 때 막 쓸어 담았어. 당근에다 한 개에 백 원씩 팔아도 불티나게 팔려.
집에서는 아까워서 꼭한 개씩 먹는데,
밖에 나오면 꼭 두 개씩 타먹곤 해.
그래서 종이컵에다 믹스커피 노란 맛으로 두 개를 타서 홀짝홀짝 마시는데 하~~ 커피맛이 죽여주는 거야.
고색창연한 천년 고찰에
범종소리 댕~댕~울리고, 오색 연등사이로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선녀 보살님들의 옷고름이 바람에 살랑살랑거리는데, 치마폭에다 시 한수 끄적여주고 싶었어. 조금 더 앉아 있으니 풀 먹인 회색 장삼을 차려입으신 스님네들이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들락날락하시는데 고고한 학들이 노니는 거 같았어.
왜케 사람들이 많아. 사람들에 깔려 죽는 줄 알았어. 밥때가 되니까 줄을 서는데, 햐~ 말이 안나올정도로 사람 많이 왔더라.
설마 내 브런치 이전 글 보고서 비빔밥 먹으러 온건 아니겠지. 내가 공양간으로 몰래 들어가서 비빔밥 가져왔으니까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음 초파일에밥을 굶을뻔했어.
그니까 내가 절에 갈 때는 절복바지를 꼭 입고 가라 했잖아.
11시부터 길게 늘어선 줄이 끝날 줄 모르는 거야. 비빔밥 3천 개가 금방 동나니까 떡을 나눠주려고 박스를 나르더라고. 얼른 다시 가서 줄을 섰지. 오매나~ 떡에 무지개 뜨는 거 첨 봤어. 무지개떡이랑, 쑥절편, 약밥을 한 봉지씩 나눠주는데 사람이 원체 많으니까 봉사자들이 양쪽에서 나눠주는 거야.
그래서 왼쪽줄에 서서 받고 얼론 오른쪽 줄에 가서 또 섰지. 기계적으로 얼굴도 안 보고 나눠주더라고. 그런데 이번에는 떡이 똑 떨어졌어. 줄은 그대로 이어져 있고말야. 세상에 배고픈 사람들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거야.
그러니까 스님들이랑 봉사자들이
이번엔 단팥빵을 나누 주는 거야.
내가 쑥떡을 먹다가 또 일어나서 아까맹키로 왼쪽줄에 한번, 오른쪽 줄에 또 한 번 섰지. 빵순이가 어떻게 빵을 끊어. 빵은 절대 못 끊지. 이 다라사에서는 내 취향을 귀신같이 알아서 내놓는 것 있지? 고맙더라고.
신기한 게 뭔 줄 알아? 비빔밥, 떡, 빵을 몇백 개씩 나눠줘도 줄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거야. 사람들이 앉아있는 간이 테이블에는 도시락, 빵, 떡이 수북해. 나 같은 핑여사들이 너무 많은 거 있지. 나중에는 더 내놓을 게 없는지 그 많던 봉사자들이다 도망가버리고 공양간을 잠가버리더라고.
그러니까 진짜 비빔밥, 떡, 빵을 받지 못한 배고픈 사람들이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아니, 내가 시줏돈을 얼마나 했는데 초파일에 절에서 밥을 안 줘?
이 날도둑놈 같으니라고!
야!! 주지나와!
초파일에 밥을 안주는 절이 세상천지에 어딨어?
두고 보자, 이놈들, 벼락이 떨어질 거야!
밥 줘! 밥 내놔!"
얼마나 무섭게 덤비든지 정말 쫄았잖아. 일주문을 톱으로 썰어가는 줄 알았어.
밥을 굶으면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변한다던데 혹시, 내가 빵빵하게 챙긴 걸 알면 몰매 맞아 죽을 것같더라구.
그래서 얼른 노래자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우르릉~~ 콰과과~쾅!! 좋았던 날씨가 갑자기 돌풍이 불고 비가 우두둑둑 거세지는 거 있지?
밥을 다 안 줘서 그런 건가 싶었어.
그러자 사람들도 다 뿔뿔이 흩어지고 노래자랑도 취소되어 버렸어. 올해 인기상에는 작년처럼팔다 남은 달마액자가 아니라 상품권 십만 원으로 올렸다는데, 어휴 아까비.
하필 비가 올게 뭐람. 이제 이 짓도 쪽팔려서 못해먹겠어.내년에는 그냥 절 끊고 교회로 갈까 생각 중이야.
큰 가방 반도 못 채우고 비 쫄딱 맞으며 집구석으로들어왔지.
집에 와서 한잠 때리고 났더니 배가 고프더라고. 원룸밑에 있는 편의점으로 초파일에 받은 것들을 나눠주러 내려갔지.
그랬더니 주인아줌마가내손을 덜컥 잡으며 반갑게 말하는 거야.
작년 초파일에 내가 나눠준 떡을 먹고 딸이 서울대에 떡허니 붙었다네.
나도 뿌듯하더라고. 내가 아침 일찍부터 절간을 누비고 다닌 게 헛된 것은 아니었구나 싶은 게
도망간 서방 놈이 다시 온 것처럼 기뻤어.
오늘 절에서 가져온 떡을 내놓으니
이번에도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맛 요플레 4 ×2줄을 내놓는 거야. 아놔~어이가 없어서리. 내가 준 떡을 먹고 서울대에 들어갔으면, 크게 쏴야 되는 거 아냐?
자식이 서울대 들어갔는데 나 같으면 고맙다고
편의점을 내 명의로 돌려주고도 남았을 거야.
요새 인심 왜이래?
빈정상해서 요플레 대신 쏘주 한 병하고 컵라면 집어 들었어. 그랬더니 주인이 카운터 앞에 있는 세 개짜리 구운 계란을 챙겨주는 거야.구운 계란 덕분에 맘이 풀리긴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