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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Jun 18. 2024

시시한 존재들의 묵직함

내게 있어 정말 너무 시시하지만 가장 필요한,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그 무엇이 있다. 길을 걷다가 이것이 보이면 얼른 주워서 주머니에 넣는다. 혹시 더 없나 싶어 두리번거리기조차 한다. 을 먹을 때에나 잠을 자다가 이게 없으면 손으로 더듬거려서 꼭 찾아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불안해서 주머니마다 한두 개씩 꼭 가지고 있어야만 든든하다.  하찮은 것을 막상 사려고 하면 파는 곳이 별로 없다. 문구점까지 가야 한다.

 

 밥을 먹거나 씻을 때, 책을 읽을 때, 이것이 없으면 매우 불편하다. 

나에게 있어 시시하지만 묵직한 그 무엇은 바로 노란 고무줄이다.

 


난 머리숱이 많고 긴 편이다. 먼저 촘촘한 빗으로 머리를 빗어 노란 고무줄로 한번 묶은 뒤 헤어망 리본핀으로 단정하게 고정한다. 이런 헤어 스타일을 30년 넘게 고수하고 있다. 일명, 승무원 헤어스타일이다.

일 년에 딱 두 번 미장원에 간다. 뒷 머리만을  5~7센티 정도 커트하는데 12,000을 받는다. 이 돈이 아깝다기보다 파마냄새가  곤혹스러워 코를 막고 앉아있곤 했다. 장날이면 할머니들 뽀글 파마 손님들이 많다 보니 차례에서 밀려나 한참기다려야 한다. 파마 중화제액과 염색약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느 날, 미용 가위를 사다가 욕실에서 대충 잘랐더니 아주 효율적이다. 진작에 스스로 자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혼자 뒷머리를 자른다.


어차피 나는 머리카락을 헤어핀 망속에 집어넣기 때문에 머리끝이 들쑥날쑥 차이가 나더라도 아무도 모른다. 감쪽같다. 다른 예쁜 헝겊 고무줄이 있지만 헐겁고 느슨해서 스르르 벗겨진다. 노란 고무줄이 가장 짱짱해서 풀어지지 않는다.

고무줄로 묶는 게 습관이다 보니 잠자면서까지 묶고 자야 한다. 자다가 고무줄이 튕겨나가 긴 머리카락이 얼굴에 닿으면 간지럽고 거슬려서 잠이 깬다. 찾아내어 묶고 나서야 온전히 잠잘 수 있다. 그래서 내 손목엔  금팔찌대신 노란 고무줄 두세 개가 감겨있다.


그러다 보니 긴 머리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분을 만나면 당장  손목에 감긴 고무줄 팔찌로 묶어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어떻게 저 치렁치렁한 머리를 가지고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일상생활을 다 할 수 있는지 내가 더 의아스럽다. 바라보는 내가 불편스러워 손목에 차고 있는 노란 고무줄 팔찌를 건네면 괜찮다, 며 사양한다. 나만 불편한가보다.


정수기 빨간 고무패킹과 시시한 것들

이 작은 빨간 고무링패킹 역시 없으면 안 되는 존재이다. 정수기 물을  많이 뺄 수 있는 호스에  빨간 고무링 패킹이 튕겨나가면 물을 받을 수가 없다. 수기 배꼽에 달려있는 저장된 물을 시간에 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그 어떠한 것으로 대체불가이다. 한 컵 씩 일일이 따라 부어야 한다. 있으나마나 한 시시한 존재가 사라지면 빨간 고무 팽킹만 교체하는 게 아니라 호스 전체를 교환해야 한다.

시시하지만 작고 소중한 대체 불가인 것들.

살펴보면 참 많다. 지금은 곳곳에 편의점이 있어서 웬만한 것들은 구비가 되어있지만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상황은 열악했다. 늦은 밤 도착한 깊은 숲 속, 우리만이 아는 비밀 장소에 캠핑하러 갔다가 라이터가 없어서 생라면을 부셔먹었던 기억들, 서로 챙긴 줄 알았다면서 얼굴을 붉히고 와인따개가 없어서 축하파티를 생수로 대신했던 일도 많았다. 시시한 것들이 준비되지 않아서 낭패와 곤욕을 치르던 일들이 생생하다. 이것들이 없어서 얼마나 당혹한 순간들이 많았던가. 차량에 냉각수가 떨어져 멈추려는 위기의 순간, 먹다 남긴 생수는 엔진의 생명수이다. 급한 볼일 때문에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지가 없다면? 마침 옆에 칸에서 건네주는 화장지 한 줌이 사람을 구한다.

나이 지긋한 선배언니는 손가방 안에 옷핀, 대일밴드, 아스피린, 바늘과 실... 등을 넣고 다닌다. 그녀의 작은 가방에 꾸려져 있는 시시하고 사소한 것들. 그 시시한 사소한 것이 위기를 모면하게 하고 바늘 한 개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그녀의 가방 속엔 없는 것이 없다. 말만 하면 다 나온다. 난 그녀를 항시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시시하지만 꼭 필요한 것들. 제각각 그들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시한 존재들의 묵직함. 눈을 크게 뜨고 살펴 볼일이다.

(배경사진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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