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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Jun 25. 2024

手話 장례식

 큰 올케가 오십 세의 나이로 이승을 떠났다. 어린 두 딸을 남겨두고 제대로 눈이나 감았는지...

가벼운 피로인줄 알았더니만 그게, 청천벽력의 담낭암 말기였던 것이다. 넉 달 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데, 또다시 우환이 겹쳐서 내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큰 올케라는 인연을 떠나 한 여자로서의 일생을 더듬어 회상하려니 벌써부터 가슴이 미어져 온다.


 큰 오빠는 공군특전 사령부에  입대를 했다.

모의 훈련도중 헬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곳이 큰 올케가 사는 마을이었다. 이미 전생에서부터 정해져 있었던 운명처럼 말이다. 목이 말라 찾아 들어간 집에서 착한 얼굴의 처녀가 말없이 물그릇을 내밀었고, 둘은 그렇게 만나 오랫동안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큰 올케는 어릴 적 질병의 후유증으로 인해 청각을 상실한 장애자였다. 큰 며느리감이 장애자라는 사실에 집안이 시끄러웠지만 둘의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중학생 무렵  큰 올케를 처음 보았다. 어린 소견에도 가난한 농사꾼의 아내로는 너무나 아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란 곱디고운 새색시가 과연 고된 농사일을 함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내 어머니께서는 그만한 흠 이 없었더라면, 우리 집안으로 시집을 왔겠느냐며 오히려 좋아하셨다.  

 

큰 올케는 워낙 눈썰미가 뛰어날뿐더러 제대로 가정교육을 받아서인지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낭패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올케는 들리지는 않지만 보통의 단어들은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는 없었다. 말하는 사람의 입 모양을 보고서 뜻을 알아차렸고 잘못 알아들을 때에는 손바닥을 내밀어 '다시 써주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고부지간에 흙바닥에 부지깽이로 글을 쓰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장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고부지간이라기보다 친딸과 엄마의 다정한 모습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큰 올케에게 농사일은 거의 시키지 않으셨다.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어머니는 보물을 얻은 양 아끼고 돌보며 든든한 바람막이 역할을 자처하셨다.

 

 연이어 두 딸이 태어났다. 혹시나 아이들의 귀에도 이상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정상적으로 태어나 가슴을 쓸어내렸.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신이 진노할 정도로 행복이 지나쳤던 것일까?

뜻하지 않은 사고로 큰오빠는 미처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 한마디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집안의 버팀목으로 든든히 서있던 큰 아들을, 가슴에 묻은 내 부모님의 슬픔은 둘째 치더라도, 새색시 티가 여전한 아내와 고물고물 한 어린아이들이 눈에 밟혀 큰 오빠는 또 어찌 눈을 감았을고.

그때 오빠 나이 고작 서른셋, 큰 올케가 서른 하나였다.


 큰 올케가 남편을 여의고 근 이십여 년의 세월을 어떻게 지내왔는지는, 두 딸들이 내로라하는 대학에 합격한 것으로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을 일이다. 새언니는 재가를 하거나, 친정집으로 거처를 옮길 수도 있었지만 부모님 곁에 남았다. 손녀 사랑이 너무나 애틋한 우리 부모님을 외면할 수 없었고 큰 며느리의 사명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올케는 이삼 년만 더 뒷바라지하면 안정적인 직장인이 되어줄 거라는 희망으로 새끼에게 자기 살을 내어주는 어미 우렁처럼 살아왔으리라.


늘 피로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누구도 암세포가 자라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야속하게도 세월은 끝내 큰 올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발병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고 일 년여를 질병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회복되지 못했다.

그때 나의 아버지 역시 암투병 중에 있었는데,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종합병원에 함께 입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서로에게 충격이 될까 봐 쉬쉬하며 이 사실을 끝까지 발설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위급한 상황에 급급하느라 큰 올케까지 염려할 여유가 없었다. 아직 젊으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있을 줄 알았다. 막내 시누인 나는  철없는 행동들을 늘 감싸 안아주셨던 올케언니에게 작별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감사했어요, 사랑합니다.' 그  짧은 말 한마디를 전하지 못했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장례식장에서 마주하고 말았다. 내가 전하지 못한 말은 허공 속에 흩어져 끝내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고야 말았다.  


장례식장은 숙연했다.

영정 속에서나마 환하게 웃고 있는 큰 올케의 청초한  모습에 다들 오열을 터트렸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두 조카들이 상주가 되어 손님을 맞았다. 흰 상복을 입은 두 조카의 모습이 왜 그리 시리고 안쓰럽던지 위로의 말 한마디는커녕 눈길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어야만 했다. 


큰 올케가 믿음으로 의지했던  <전주 에바다 농아교회> 신도 분들이 빈소를 가득 메워주셨다. 큰 올케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이는 등 우리 가족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주신 고마운 분들이시다. 가끔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교회를 방문하곤 해서 낯익은 얼굴들을 장례식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목사님도 농아자여서 기도와 설교 말씀이 모두 소리가 아닌 手話로 진행되었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대성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다른 영안실과는 영 달랐다. 고요했다. 아니 숙연했다.

고인의 명복을 소리 아닌 손짓으로 표현하는 장례의식.

소리를 잃어버린 고인의 영혼을 위해 소리 잃은 사람들이 올리는 소리 없는 손짓.

손짓으로 전하는 하느님 말씀.

손짓으로 올리는 예배 기도.

손짓으로 부르는 소리 없는 찬송가.

그리고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

특히 한 음절 한 음절, 가사를 따라 손짓으로 부르는 찬송가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는 하나하나의 동작이 너무 슬프고 가련해서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난 찬송가를 손짓으로 부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장례식에 참석한 일부 신도님 중에는 정상적인 신도님들도 많이 참석해 주셔서 찬송가를 들을 수 있었다. 화음과 손짓으로 전하는 찬송가. 내 안에 작은 씨앗으로 남아있던 하느님이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손짓의 찬송가를 부르던 성도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두 뺨 위로 멈출 줄 모르고 흘리는 눈물이 장례식장을 흥건히 적셨다. 애써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수화로 찬송가를 부르던 목사님은 나중에 울먹이면서 손가락을 떨었다. 손이 그들의 목소리였다. 손이 그들의 감정이었다. 떨리는 손가락 한 동작 한 동작이 그들의 언어였다.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이며 찬송이었다.


해보다 더 밝은 저 천국

믿음 맘 가지고 가겠네

믿는 자 위하여 있을 곳

우리 주 예비해 두셨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 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 가 만나리



듣지 못한다고, 말하지 못한다고  멸시하며 비웃는 세상 사람들에게, 정상인과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 냉대와 수모를 안겨주는 이 사회에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말이 아닌 손짓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오직 주 예수의 품 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며 오롯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 나비의 날갯짓을 닮은 사람들.

그 어떤 수도자가 이와 같을 것인가.

그 어떤 지도자가 이와 같을 것인가.

굳이 말을 하지 못하여도, 듣지 못하여도, 마음과 마음으로 주고받는 손짓의 대화가 있기에 우리 올케는 오직 주 하느님에 의지하여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같은 고통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농아교회. 그곳에 모여 손짓의 대화로 기쁨과 슬픔을 어루만지며 지내온 참으로 맑고 아름다운 사람들. 우리 올케는 주님이 계신 그 교회에서 비로소 평안과 안식을 얻었으리라. 말이 통하지 않은 친정 가족들보다 시댁식구들보다 더 마음 놓고 손짓의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손짓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름을 덜고 웃음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리라.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절친하게 지내오던 동료가 오늘 주님 곁으로 떠났으니, 일찍 남편을 여의고 어린 두 딸을 키우며 살아온 가련한 성도가 주님 곁으로 떠났으니, 오늘 같은 날 어찌 울지 않을 수 없으리. 어찌 소리 내어 울지 않을 수 없으리.

하지만 이런 날 소리 내어 울고 싶어도, 목 놓아 통곡하고 싶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는 설움을, 침묵의 절규를, 소리 없는 울부짖음을 무엇으로 표현한단 말인가,  이 소리 없는 숙명의 고통을 과연 세상 사람들은 들을 수 있을까? 그 큰 두  귀를 열고 마음으로 들을 수 있을까? 그 손짓 하나하나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소리를 잃어버린 그들 앞에서 나는 감히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목소리를 숨길수밖에 없었다. 소리 내어 운다는 게 죄스러웠다. 한없이 부끄러웠다. 장례식이 끝나는 날까지 목소리를 거의 내지 못했다. 언니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입을 가리고 조용히 속삭이는 게 전부였다. 


소리 없는 나비의 날갯짓으로 보내는 눈물의 영안실.

왁자지껄한 다른 방과는 전혀 다른 신성한 눈물의 성소.

 장례를 치르는 사흘 내내 그 소리 없는 눈물의 의식은 아주 조용하고 경건하게 치러졌다.

난 내 안의 하느님을 향해, 올케가 믿고 의지했던 주 예수를 위하여, 장례식에 모여 손짓의 찬양을 올리던 주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소리 없는 눈물로 호소했다.

'하느님, 우리의 가족이었던 올케언니가 어린아이들을 두고서 젊은 나이에 주님 곁으로 떠나오니 부디 천국에서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우리 가족들이 너무나 고생만 시켜서 죄송했다고, 올케언니를 챙기지 못해서 죄송했다고 전해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가 올케 언니를 사랑했으며 그리워한다고 전 주십시오. 부디 그녀의 영혼이 주님의 품 안에서  편히 쉬게 하시옵소서.'


성도들의 소리 없는 기도와 찬송과 눈물을 큰 올케는 듣고도 남았으리라. 천국에서는 천상의 소리는 물론 지상에서 올리는 기도 소리를 빠짐없이 모두 듣고 있으리라. 남겨진 두 딸아이가 엄마에게 올리는 기도소리를 모두 듣고 있으리라.

 올케가 믿음으로 의지하던 주 하느님이 그녀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하였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큰 오빠의 영혼까지 함께 거두어 천국에서 안식을 얻게 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순결한 그의 영혼이 늘 두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멘.


 큰 올케 언니가 주님 곁으로 떠난 지 이십 년 정도 흘렀습니다. 이 글은 장례식을 치르던 그 무렵에 쓰인 글이며 두 딸들은 현재 간호사, 교육공무원으로 재직하며 가정을 이루어 예쁜 자녀를 두고 지내고 있습니다. 저와는 종교는 다르지만 삶과 죽음 앞에 종교가 다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종교가 가져다주는 개개인의 안식과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올케의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소리 없는 찬송. 손짓으로 전하는 하느님 말씀. 그 일을 계기로 제 안에 하느님이 더 크게 자리 잡았으며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부터는 기독교인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하느님의 영광, 부처님의 자비가 함께하시길, 고요와 평안이 깃드시길 진정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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