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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조음 Feb 14. 2024

논개 정신으로 사는 여자

라면 먹고 갈래?

나는 체질적으로 버리지 못하는 사람에 속한다. 워낙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아끼고 아끼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탓인지 덥석 사지도 못하지만  또한 내 안에 들어온 것들은 쉽사리 버리지 못한다. 새 수건을 쓰다가 닳고 닳아서 실들이 풀어지면 걸레로 사용하고 여기저기 구멍이 뻥뻥 뚫려서 걸레로도 쓰지 못하면 신발장이나 창틀을 닦은 후에야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수건  장을  닳을 때까지 쓰는 습관으로 절약하였으면 지금쯤 중간 부자정도는 될 법한데,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꼭 아끼고 절약해서 부자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기사 수건  한 장 아낀다고 바로 부자가 되랴마는 내가 이사를 대여섯 번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사는 게 몇 가지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물에 휩쓸려간 논개 정도는 아니지만  으지짢은 수건 한 장을 아낀 대신,  목돈을 부어서 모았던 것들,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것들, 고장 나지 않아서  차마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사는 것들에 대한 깔무짢은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재산목록 1호  금장 오디오

언제 샀는지 가물하지만 족히 40년 된 최고 명품 금장 인켈 오디오이다.  아마 레전드 지휘자 캬라얀을 모델로 내 세워 그때 당시 최고가 3백만 원 정도 주고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피커 길이 만 120센티에다 무거워서 혼자서는 들지 못한다. 수건 한 장 한 장 아껴서 할부로 샀다. 아니 거꾸로 할부금 갚느라 수건 한 장을 구멍 날 때까지 써야만 했다. 작은 가게를 더 크게 운영하고 싶어서 무리하게 건물을 올리고 확장하려다가 좌초되어 끝내는 작은 가게까지 시원하게  말아먹는 경우가 많다. 나도 같은 케이스이다. 삼성전자 주식 대신 인켈 오디오를 결정한 것이 오늘날까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월급 몇 푼에 목줄 잡혀서 사는게 현실이다.


 이사를 다닐 적마다 기사 아저씨가 깜짝 놀라곤 한다. 살림살이는 라면박스 4개가 고작인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최신형 오디오와  책들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혼자 우스개 소리로 내가 사나이였다면 한때 유행했던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버전대신

"우리 집에서 음악 들을래?"

그 한마디로 여럿 아가씨들 꼬셨을 것이다.

그땐 나에게 있어 인켈오디오는 지금의 '포람페'(포르셰, 람보르기니, 페라리)와 같은 '젊음의 환상', 혹은 '격한 허세'였는지 모른다.


 내가 어른이 되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뭔가 한가닥 할 줄 알았다.  


'호리호리한 중년 여성이 가난을 복하고 자수성가하여 잔디가 깔린 별장에 가끔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혼자서 찾아온다. 호수가 보이는 창 넓은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서 갓 내린 최고의 원두 커피를 마신다. 무릎엔 고양이가 그릉그릉 골골송을 부르며그루밍을 하고 있다. 그녀가 가난한 시절에 보았던 영화 '쇼쌩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교도관 사무실 문을 잠그고 책상에 발을 올리고 들었던 모차르트의 음악을 다시 꺼내 듣는다.'

  

먼 훗날 가난한 자취방에서 들었던  음악들을 기억하고 싶어서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 젊음이, 내 청춘이, 내가  꿈꾸던 세상이, 이 오디오 안에 녹아있어서 논개처럼 끌어안고 장렬히 죽을지언정 차마 보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인켈제품 CD 5장을 넣어두고 듣고 있는데 음질이 깨끗해서 명품 값어치를 톡톡히 하고 있다. 가끔은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와 고물 오디오를 보면서  만감이 차하기도 한다.


 뒤주 &문갑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뒤주와 화려한 장식의 문갑이다. 친정어머님이 시집오실 때 가져오신 물건들이다. 어머님 세상 떠나시고 버리기 아까워 가져왔. 농부의 집안이라 쌀걱정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다 높은 뒤주를 깨금발을 하고  간신히 열어젖혀서 두 손으로 쌀을 올렸다흘리는 장난질을 하며 놀았던 것 같다. 귀한 양식으로 장난친다고 부지깽이로 많이 얻어터지곤 했지만 오도독 씹히는 생쌀의 고소한 맛과 감촉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은 오만가지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용도로 사용한다


골드 스타 냉 온풍기

이름만 들어도 추억 돋는 골드스타 냉온풍기이다. 사십 년 전 제품이다. 5~6년 전까지  실 사용할 정도로 본전을 빼고 빌딩 지을  정도로 성능이 최고이며 내가 가진 최장수 제품으로 꼽는다. 지금이라도 코드를 꽂으면 작동하는데 이상이 없다. 난방은 기름과 함께 사용하지만 에어컨은 진짜 빵빵하다. 단, 헬리콥터 소리가 나서 대화는 불가능하다. 가성비 최고 골드스타 냉 온풍기에 반해서 무조건 가전은 같은 엘지를 구입하는 편이다. 이것이 소비자 브랜드 가치인 것 같다. 이것 또한  버리지 못한다. 내 첫 자영업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제품이라서 모셔두고 . 버리지 못하고 짝으로 막아뒀다.


가스렌지

가전과 살림살이는 큰 것이 실용적일 것 같아서 큰언니가 25년 전에 거금 20만 원을 주고 선물해 준 것이다. 촌 살림이라 손님들이 많이 오면  돼야지 고기 듬섬등섬 잘라 넣고 김치찌개도 한 냄비 끓여야 하고, 백숙도 삶고 계란찜도 하고, 생선도 튀겨야 할 것 같아서 4구짜리를 구입했다. 1 구는 그을음이 생겨 사용하지 못하는 반면 나머지 3구는 잘 사용하고 있다. 새로 구입하려 하니 60만 원가량 된다. 아마 120세 까지는 거뜬하게 쓰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말이다.

커피머신


이것 또한 근 이십 년 가까이 사용한 것 같다. 십만 원 보상해 줄 테니 80만 원짜리 신상으로 구입하라는 독촉이 많이 오지만  난 거부한다. 크리머가 풍부하여  원두 한 두 잔이면 행복하다. 삼 년에 한 번씩 부품이 고장 나서 에러가 뜨곤 하는데 택배로 AS 보내면 다시 말끔하게 작동한다.


에필로그

펑퍼짐한 중년의 아지매가 구설 털털한 집안을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다. 오래된 고물단지들로 꽉 차있지만 아지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 여름 주방 가스레인지 위에는 맛있는 찌개가 끓고 있고 큰 양은 솥단지에는 한약재 끓이는 냄새가 은근하게 퍼지고 있다. 거실 겸 주방에는 골드스타 냉풍기 가 돌고 있어서 서늘한 정도로 시원하다.


 어머니가 물려주신 뒤주에서 쌀을 꺼낸다. 언제나 뒤주에는 쌀이 넘치도록 그득그득 부어 두는 편이다. 그래야 부자가 된 느낌이기 때문이다. 아지매는 전기 밥솥 대신 무거운 1인용 돌 솥단지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 밥을 해 먹곤 한다. 누룽지 끓인 물을 좋아하는 식성 탓이다. 간단한 설거지까지 끝낸 후 습관처럼 오디오를 켠다. 클래식 음악 방송으로 고정되어 있어서 어느 때든지 잔잔한 음악이 흐른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 커피 머신을 누른다. '크르르륵~ 아아~'


향긋한 커피와 은근한 한약재 냄새가 묘하게 음악과 섞여 있다. 아지매 주변에 있는 살림살이는 함께 때 묻고 낡아 있지만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 이만하면 족하다. 호수가 보이는 장은 없지만 창 너머 절간이 보이는 풍경도 가히 나쁘지는 않다.


"저기요, 우리 집에서 음악 들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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