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조영웅전(2017) 후기

[애정을 담은 시선과 생각들]

by 쏘이

오랜만에 긴 중국 무협극 한 편을 봤다. 무협지 마니아들의 필독서인 홍콩 작가 김용의 소설 시리즈 <사조삼부곡(국내판은 영웅문)>의 첫번째인 <사조영웅전>을 각색한 동명의 드라마였다. 드라마는 송나라 영웅의 아들이지만 무술에 재능은 없는 곽정이라는 인물이 강호에서 다양한 영웅들과 지지고 볶으면서 최강으로 거듭나고, 금수저에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착한 여자친구 황용까지 얻는다는 내용이다.


<사조영웅전>은 1959년 소설 완결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중화 컨텐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10여 년 가까이 중국드라마를 소비해왔으면서도, 이 바이블같은 드라마는 아직 보지 않았다. 드라마의 짜임새와 영상미가 중요한 시청 기준인 나에겐 넓은 무협극의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개연성이 부족한 점과 영상의 완성도가 낮은 점이 불편했다. 거기에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 : 무공의 종류 중 하나), 구음진경(九陰眞經 : 무술의 경전같은 것) 같은 장황한 한자 무술명칭이 거북했다. 이러한 이유로 여태껏 나는 무협극 장르를 기피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조영웅전은 언젠가는 봐야할 드라마 리스트의 상단에 항상 랭크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즐겨 본 홍콩영화 속에는 사조영웅전의 2차창작물을 비롯, 소설을 모티프로 한 다양한 미장센이 녹아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너무 재밌어서 여러번 자지러지며 봤던 주성치의 <쿵푸허슬> 영화 속 장면을 사조영웅전 속에서 다수 발견했다. 영화를 본 모두가 기억할 거문고를 튕기는 공격, 사자후, 두꺼비아저씨의 합마공, 하늘에서 손바닥을 펴고 떨어지는 여래신장 공격 등 모두가 사조영웅전의 오마주였다. 주성치의 B급 코미디 아이디어가 사조영웅전의 탈을 쓰고 내 배꼽을 빼갔던 것이다.


방대한 스토리에 비해 52부작이라는 “짧은” 드라마 편성으로 스토리 진행은 상당히 속도감이 있다. 속도감이 넘쳐난 나머지 많은 내용을 뛰어넘거나, 몇 가지 에피소드를 대사로 설명하고 넘긴다. 거기에 중요한 스토리라인을 작중행적이 아닌 캐릭터의 입을 통해 직접 서술하거나 적의 전략은 항상 엿들어 알게되는 등, 전형적인 중드의 일차원 전개방식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중드의 고질적 문제는 여기서도 아쉬운 지점이었다.


다만, 부족한 구성의 한계를 화려한 무술 씬과 탄탄하면서도 신선한 원작 스토리로 꽤나 극복한다 생각했다. 악인 중 한명인 양강은 충신의 아들이자 곽정의 의형제로, ’선한 사람의 자녀 역시 선하다‘는 콩콩팥팥같은 고정관념을 깬다. 등장하는 영웅들은 입체적이면서 하나씩 결점이 있는 인간적인 모습이 있다. 정의롭지만 착하지 않고 괴팍하다거나, 의협심은 넘치지만 성격에 꼬인 구석이 있어 주인공의 사랑을 방해한다. 거기다 악인의 가벼운 이간질에 영웅들은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서로를 죽이려 달려든다. 직전까지 곽정을 죽이려던 악인은 막상 곽정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구해주는 것도 모자라 밥도 챙겨준다. 이렇듯 드라마는 선과 악의 모호함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허무맹랑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봐도 가끔은 그 허무맹랑이 극에 달해 웃긴 포인트가 많았다. 최종 빌런 구양봉은 경전을 거꾸로 외우자 몸의 경맥 또한 거꾸로 흘러 물구나무를 서서 다니게 되는데, 수련을 잘 해서 다리보다 빠른 속도를 얻는다. 곽정이 절벽을 올라가기 위해 수십개의 양다리를 절벽에 붙여 밟고 올라간다는 설정은 최근 5년 간 본 드라마 중 가장 웃긴 장면이었다. 곽정의 무공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드라마에서는 지구라는 중력장에서는 불가한 기술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 설정은 사실 내가 드라마 포기를 고민한 지점이었다. 그러나 어느새 스며들었는지 마지막의 화려한 무술 장면에선 마치 내가 인간과 지구라는 한계를 벗어난 듯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중드와 사극매니아인 아버지께 이 드라마를 추천했었다. 송말원초(송나라 말~원나라 초기)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과 칭기스칸 등 실존인물의 등장에 사극을 기대했던 아버지는 예상밖의 전개에 불평을 쏟아냈다. 뭐 이런 유치한 걸 추천하냐고 가벼운 욕도 먹었다. 그치만 나는 오랜만에 만난 리얼리티를 훌쩍 벗어난 드라마에서 현실에서 굳어지던 뇌가 환기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현실에서 벗어나는 드라마 설정을 인간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드라마가 리얼리티에서 한참 벗어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리얼리티를 원하는 시청자들도 현실성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순수하게 즐겨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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