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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소유 Oct 29. 2023

[나 혼자 도전기] 나 홀로 목욕탕

목욕탕 간접체험 시켜드립니다

 대중목욕탕을 싫어하는 자. 가엽기도 해라.

 소유는 목욕탕을 좋아한다. 목욕비를 내고 여탕에 첫 발을 들이는 순간 맨발에 닿는 깨끗한 장판과 수건에서 나는 잘 건조된 세탁물 냄새부터 맘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목욕탕에 들어서면 매점에서 파는 메뉴는 무엇인가 샅샅이 구경해봤고 욕탕의 종류나 규모가 크면 절로 신이 났다. 어렸을 때는 어쩐지 벗은 몸이 부끄럽거나 어색하기도 했지만 2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남들은 생각보다 저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오늘처럼 혼자서 목욕을 온건 처음이라 괜히 낯선 기분이기도 했다.

 목욕탕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지는 한참이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몇 년간 요원하기도 했으나 혼자 산 이후부터 목욕탕에 가는 것은 제법 어려운 일이 됐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목욕탕에서는 직장동료나 아는 사람을 만날까 걱정됐다. 그렇다고 멀리 있는 목욕탕에 가자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해서 귀찮았고, 죄다 가본 적이 없으니 시설이나 이용객들이 괜찮은 목욕탕인줄 알 수 없어 망설였던 것이다. 소유가 선호하는 목욕탕은 층고가 낮지 않고 서로 다른 온도의 욕탕이 3개 이상 있으며 목욕 정기권을 끊은 어른들이 가운데 평상을 전부 차지하지 않아서 편하게 제 짐을 올려 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매점에서 구운 계란과 미에로화이바를 팔면 더 좋았다.

 그러나 얼마전 헬스장에 받으러 갔다가 제 허벅지가 닿았던 운동기구에 뽀얀 때가 조금 묻어있는걸 발견한 이후에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건 여태 스크럽으로 북북 문질러 닦던 팔다리에 아직도 때가 바글바글 껴있다는 증거였다. 어쩐지 계속 때를 밀고 싶더라니! 여태 몸이 굼실거릴 때마다 얼마나 열심히 스크럽을 했는데! 소유는 남몰래 운동기구에 때를 털며 억울하고 다급해져 네이버 지도에 찜질방, 목욕탕을 검색했다.

 코시국을 거치며 찜질도 트렌드가 변했는지 검색 결과에는 자꾸 효소더미에 몸을 잔뜩 묻어놨다가 발굴된 화석처럼 몸을 뉘이고 씻기는 업장만 나와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뜨끈한 물이 가득담긴 욕탕에 발끝부터 목까지 푹 잠겨있다 나올 수 있는 곳이, 욕탕에서 나와 찬물로 목을 축이면 싸르르 몸에 퍼지는 수분을 만끽하는게 목욕탕이지. 이런건 왜 자꾸 뜨는거야? 소유는 괜히 남의 사업장에 불만을 토하다 적당한 곳을 하나 찾았다. 걸어선 35분, 지하철로는 1정거장. 아는 사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고 탕은 적당히 넓어보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결심이 선 소유는 홀로 목욕탕행을 감행한다.

 토요일 아침 7시 40분. 소유는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당겨 묶고 짐을 챙겼다. 샴푸, 트리트먼트, 바디워시, 마스크 팩, 때르메스 때수건, 로션, 갈아입을 옷, 마지막으로 초코맛 단백질 음료 하나. 목욕 바구니가 없어 지퍼팩에 짐을 담고 다시 쇼핑백에 짐을 넣어 들기 쉽게 만들었다. 목욕바구니를 달랑 챙겨 나서자니 이번엔 가는 길이 고민이었다. 걸어서 갈까, 지하철을 타고 갈까. 아침이라 산책하기 좋게 선선했지만 35분을 걷자니 너무 오래 걸리고 지하철로 가자니 9월의 선선하고 환상적인 날씨가 아까웠다. 소유는 잠시간 고민 끝에 지하철 역까지 조금 돌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날씨는 가히 예술적이었다. 선선한 바람에 몸에 닿는 아침햇살의 가벼운 따듯함이 기분 좋았다. 동네 빵집과 허술한 조각상이 있는 공원,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음식점들 사이를 걸으며 소유는 이어폰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오늘 같은 날 실리카겔의 no pain을 들으면 진짜 좋을 것 같은데. 아쉽지만 집에서 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지하철을 탔다.

 시간은 아직 8시 10분인데, 지하철에는 주말 아침부터 멀끔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어딜 가는걸까 궁금해하며 소유는 꾀죄죄한 자신의 몰골이 조금 민망해졌다. 하지만 날씨는 좋고 오늘은 대망의 목욕이다. 짐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다시금 실감이 났다. 이렇게 목욕을 가는게 얼마만이더라. 늘상 같이 목욕에 가던 언니는 이제 제주도로 떠나버렸고 엄마는 피부 건선 때문에 목욕탕 금지령이 내려졌다. 소유는 가끔 이런 식으로 세월이 지났음을 실감할 때마다 서럽고 아쉬워서 마음을 꾹 눌러 앉혔다.

 아쉬움과는 별개로 같이 갈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뭔가를 그만두는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필라테스에 함께 다니던 직장동료가 그만두었을 때 함께 지쳐 나동그라졌다면 얼마나 후회가 깊었겠는가. 곧잘 영화를 같이 보던 친구가 더 이상 영화관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소유는 혼자 영화관을 찾았다. 홀로 남은 설움을 채우려면 더 바쁘게 움직이고 나를 잘 채워주는 수 밖에 없다. 소유는 다시 단단해진 마음으로 지하철에서 내렸다. 목욕탕은 역에서 단 1분 거리에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가며 소유는 목욕탕의 규모를 짐작했다. 규모가 큰 목욕탕은 대부분 저층이나 지하에 있다. 지은지 제법 오래된 곳들이라 규모가 큰 경우도 있었지만 물이 워낙 무겁다보니 고층에 있는 욕탕들은 아주 클 수가 없는게 당연했다. 그러니 고층에 있는 목욕탕은 욕탕보다는 찜질방과 휴식공간의 규모가 큰 곳일 가능성이 높았다. 큰 기대는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소유는 설렘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목욕탕은 깔끔했다. 인테리어나 시설로 보아 생긴지는 오래된 것 같지만 깨끗했고 낡은 구석은 없었다. 카운터에서 목욕과 찜질 중 목욕만 하겠다고 답하며 소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서 좋았다. 욕탕으로 향하는 길, 찜질복을 입고 전날부터 자리를 지켰던게 분명한 사람들을 둘러보며 소유는 웃었다. 대부분이 20대 초중반이었고 가끔 아저씨들이 보였다. 나도 저럴 때 있었지. 지금은 저렇겐 못 논다. 대신 혼자 목욕탕에 와서 아침목욕을 즐기는 어른이 됐으니 괜찮았다.

 옷을 훌훌 벗고 소유는 서둘러 욕탕으로 향했다. 가운데에 39도짜리 큰 탕이 하나, 양 옆으로 40도 탕 하나와 저온탕이 하나. 맨 안쪽에 커다란 냉탕이 한 곳. 그리고 저쪽 구석으론 세신을 받는 곳이 자리해있었다. 예상했던대로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사람이 많지 않고 물이 깨끗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머리에 물을 적셔 머리부터 감았다.

 머리카락에 삼푸를 넓게 발라 거품을 내고 두피를 손끝으로 문질러 구석구석 문지르는건 소유의 오래된 습관이다. 두피가 민감한데 숱도 많아서 구석구석 닦지 않으면 여름마다 금방 찝찝해지고 진물이 생겼다. 여름이 끝나가니 아쉽지만 두피건강에는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머리를 뽀득뽀득 씻어낸 다음엔 머리 끝 쪽으로 트리트먼트를 발랐다. 슬슬 자를 때가 됐는데 귀찮아서 방치했더니 제법 길어졌다. 머리가 상한걸 느끼기 전에 다 잘라버리는게 제일 편한데. 언제 자르러가지. 조만간 미용실에 가야겠다 생각하며 대충 행군 머리는 다시 똘똘 말아 묶어 버렸다. 탕에 머리카락이 동동 떠다니면 보통 민폐가 아니니까. 몸도 대충 씻어내고 나자 열심히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는 사랑스러운 욕탕이 보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지. 소유는 즐거운 마음으로 욕탕으로 향했다.

 가장 규모가 큰 39도 욕탕에는 두꺼비모양 조각상이 물을 뿜고 있었다. 발 끝에 물이 닿으니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소유는 재빠르게 허리까지 몸을 담갔다. 배 중간에 와 닿는 물결의 슬렁거림과 몸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열기가 좋았다. 으으. 속에서부터 기분 좋은 신음이 새어나와 침을 꿀꺽 삼켰다. 왜 물로 채운 온기는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끊임없이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와 식지도 않고, 발을 아무리 뻗어도 닿는 곳 없으나 안전한 욕탕 안에서 소유는 기분좋게 몸을 굴렸다. 배가 바닥으로 가게 엎드리듯 누웠다가, 계단에 앉아서 어깨에 물을 끼얹었다가, 목까지 물이 잠기도록 폭 담갔다가를 반복하며 열심히 물을 즐겼다.

 물을 좋아하는 동시에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욕탕은 얼마나 안전하고 즐거운 놀이터인가. 수영장도, 바다도, 계곡도, 풀빌라의 넓게 트인 욕조도 좋았지만 소유가 제일 좋아하는건 역시 목욕탕이다. 따듯한 열기도 수증기도, 때를 벗겨낸 몸이 보들보들하게 변하는 과정도 좋지만 무엇보다 맨몸으로 물을 즐길 수 있다는게 최고였다. 물결을 타고 배 안쪽부터, 뼈와 살에서부터 따듯하게 차오르는 온기와 맨몸에 와 닿는 물의 감각은 마음을 차분하고 행복하게 했다. 옷도 체면도 홀딱 벗은 어른들이 물에 몸을 담그고 나른하게 앉아 있는 모양새도 인간적이지 않은가. 소유는 열심히 몸을 적시며 욕탕에서의 시간을 만끽했다.

 탕에 몸을 불렸으니 때를 벗겨낼 시간이다. 소유는 양손에 때르메스 장갑을 끼웠다. 때르메스는 때밀이 수건계의 에르메스라는 뜻인데 살이 아프지 않게 때를 벗겨주어서 생긴 이름이라 했다. 사실 일반적인 때타월로 밀면 화장실 청소가 귀찮을 것 같아서 샀고 집에서도 써본 적이 있긴 했지만 목욕탕에서 본격적으로 써보는건 처음인지라 어쩐지 기대가 됐다. 얼마나 성과를 내 주려나.

 때르메스는 아프지 않고 때가 인위적으로 밀리지 않아 때가 술술 밀리는 느낌보단 자연스럽게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팔, 다리, 발꿈치, 손등, 목, 쇄골까지 구석구석 몸을 한참 문지르다 물줄기에 때수건을 빨면 조르륵 줄을 지어 흰 때들이 빠져나가는게 보였다. 시원스레 확인하기 어려워서 일반적인 때밀이에 비해 아쉬웠지만 덜 아프고 시각적으로 덜 더러워서 좋았다. 소유는 구석구석을 최선을 다해 문질러 닦았다. 목욕비 9000원이 아깝지 않으려면 때를 잔뜩 벗겨가야 했다.

 보들보들해진 몸에 물을 끼얹자 마무리단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소유는 얼굴에 마스크 팩을 붙이고 찹찹 두드려 폈다. 마무리로 몸을 씻고 나설 차례였다. 날이 시원해진 것 같아 파우더 향 바디워시를 가지고 왔는데 향이 적당히 진하고 촉촉했다. 기분좋게 코를 킁킁대며 소유는 거품을 씻어냈다. 거품 너머로 손에 닿는 피부는 더 부드러워 진 듯 했다. 몸에 마지막으로 따듯한 물을 끼얹고 수건으로 머리를 꽁꽁 싸맨다음 자리를 정리하자 새삼스럽게 개운함이 밀려왔다. 팩을 떼어내고 남은 에센스가 흡수되도록 얼굴을 문지르며 소유는 탈의실로 향했다.

 더 이상 제 몸이 부끄럽지 않대도 부끄러운 척 하는 것이 이 나라 젊은 여성의 미덕이다. 소유는 자신보단 남을 위해 속옷과 상의만 걸쳐입고 헤어 드라이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고전적으로 생긴 드라이어는 동전을 넣어야 작동되는 구조였다. 3분에 100원이면 나쁘지 않지. 선풍기 앞에서 1차로 머리를 탈탈 털어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전에 다니던 목욕탕과 비슷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고 서있자니 마실게 필요했다. 소유는 가지고 왔던 단백질 음료를 뜯었다. 별로 맛있진 않았지만 당류가 적고 단백질 함량이 높아서 가끔 마셨다. 밍밍한 맛이지만 어쨌든 초코우유니까. 그래도 이상하게 목욕을 하고 마시니 전보다 맛이 좋게 느껴졌다. 마지막 한 방울 까지 탈탈 털어 입에 쏟아 붓고 드디어 드라이어에 100원을 넣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3분. 이 안에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한다. 소유는 두피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며 재빠르게 모양을 잡았다. 반곱슬 머리라 조금만 신경을 쓰면 모양을 잡기가 쉬웠다.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잡아 고정시키고 뿌리 쪽에 힘을 줬다. 취향차이긴 하지만 소유의 눈에 착 달라붙은 앞머리는 친절한 금자씨에 나오는 이상한 목사 같아보였다. 놓치기 쉬운 뒷머리까지 바람을 밀어넣어 말리자 3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그래도 이정도면 부끄럽지 않은 몰골이라 생각하며 소유는 만족스럽게 거울을 봤다. 탕에서 열기를 잔뜩 머금어 볼은 아직 발그레했고 수증기와 팩으로 촉촉해진 피부에선 반질반질 윤이 났다.

 컨디션 좋은걸. 마저 옷을 챙겨입고 소유는 목욕탕을 나섰다. 시간은 어느덧 9시 40분. 목욕탕에 들어서는 손님도 아까보다 많아지고 찜질방 쪽에선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어른들이 끙끙대며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신발을 챙겨신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깨끗해진 자신의 얼굴이 꽤 뿌듯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가끔씩 찾아와야 겠는걸. 아직 몸안에서 뜨끈하게 느껴지는 열기를 느끼며 소유는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날씨는 예술적이었고 주말은 이제 시작이었다. 좋아하는 일에는 둘도 셋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으며 가볍게 옮기는 발걸음엔 노랫말 같은 햇볕이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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