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천이야기 11- 천운을 놓쳤다
500 만원만 있었으면 저 아파트가 우리 것인데.
문정초등학교 근처를 지날 때마다 문정시영아파트 재개발로 지어진 20억 한다는 래미안아파트를 보며 우린 우스갯소리를 한다.
1989년 경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성남의 2층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고 서울의 N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근무 중이었다. 학교 동료 선생님 중에 내 또래 남자선생님이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아서 이미 집이 여러 채라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내게 문정시영아파트를 사 두라고 조언했다. 요즘말로 갭투자다.
전세 2500만 원 집값은 3000만 원이니 500만 원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나는 남편과 13평 아파트를 사려고 둘러보았다. 주방이 옛날 주택처럼 생긴 곳으로 방 한 칸, 거실 겸 주방이 전부인 5층 아파트로 참으로 좁았다.
그래도 우리 식구는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 둘 수도, 살 수도 없었다.
당시 우리 집은 1100만 원 전세였고 대출에 대해 잘 몰랐다. 담보대출에 대해 알았다면 살 수 있었는데, 난 3000 만원이 있어야 산다고 생각했다.
동료선생님은 우리가 살기엔 너무 좁으니 투자개념으로 사 두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500 만원을 구할 수가 없다.
친정아버지께 부탁하려다 거절당할 것이 두려워 포기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500 만원은 너무 큰돈이고 구할 곳은 없었다.
그 후 성남에 있는 빌라를 구입하기로 하고, 지난번 놓친 것이 속상해서, 이번엔 용기를 내어 어렵게 부탁했다. 바로 대출받아 빌려주셨다.
아, 난 왜 아버지께 부탁하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학교 국어숙제는 언제나 낱말뜻, 줄거리, 문단나누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 이런 것이 무엇인지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무도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은 당시 전과를 보고 숙제를 했고 난 일찍 등교하여 친구의 공책을 보고 베꼈다.
늦게 와서 숙제를 못한 날은 손바닥을 맞았다.
그래서 큰맘 먹고 전과는 비싸지만, 값이 싼 수련장은 사 줄 수 있으려니 하고 아버지께 요청했다.
아버지는 공부 못하는 애들이 참고서 타령하는 것이라면서 교과서만 있으면 된다고 화를 내셨다.
그 후부터였을 것이다. 난 아버지께 어떤 물질적 부탁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책을 좋아했던 나는 친구집을 전전하며 모두 빌려서 읽었고, 학교도서관을 이용했다.
용돈을 요구한 적도 없고, 학비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버지께 손을 벌리는 행위는 참으로 구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참고서도 거절하는 양반한테 무엇을 요구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학교와 중학교 육성회비를 모두 낸 것을 보면 지원을 안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절대 아무 도움도 안 받을 것이라고 마음이 닫힌 것일 뿐...
고등학교와 대학을 갈 때도 허락만 해주길 바랐다.
그래도 공무원이라 대학 학비 50% 매 학기 10만 원을 무이자대출로 받아서 지원해 주셨다.
부족한 학비와 생활비는 조교로 근로장학금을 받았고 어린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과외를 하며 생활했다. 5 공시절 과외금지였으나 예체능은 허락되었다.
내가 고 3 때 1978 년 경부터 우리 집은 방앗간을 운영하였다.
고추도 빻고, 떡도 해주고, 미숫가루도 해주어, 하루 수입이 10만 원일 때도 있다고 엄마가 자랑하셨을 만큼 잘 됐다. 그래서 66평 대지에 방이 3개, 2층까지 있는 보통의 주택을 샀다. 골목 양쪽에 꽃길이 있고 대문을 들어서면 큰 마당이 있다. 이 집에 처음 방문한 남편은 아주 흡족해하며 좋아했다.
그런데 결혼 비용으로는 130만 원을 주셨다.
신혼방도 우리 것 아니냐면서...
내가 큰딸이라 부모님 입장으로는 무엇이든 처음이다.
그래서 입학, 졸업, 입시, 대학, 결혼, 취업. 등 성장과정에서 마땅히 받아야 할 부모의 지원에 대해 무관심했고 무지했다. 그냥 딸이 알아서 다하겠지 하셨다.
나 또한 요구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덕분에 나는 거의 받지 못했다
동생들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예식장에서 남들처럼 결혼하고 대학학비도 지원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은 나보다 더 불행했다. 서울로 간 큰언니, 방앗간을 운영하는 엄마대신 집안일을 모두 해야 했으며, 아버지의 폭력을 더 오랫동안 견뎌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부정적 편견이 일생에 세 번 온다는 천운을 놓치고 말았다.
한번 부탁해 볼 걸,
동양빌라 지층 1호가 아닌 서울 송파의 아파트에서 기죽이지 않고 키울 수 있었는데,
나의 늦은 용기와 무지로 아들들이 고생만 더 했다.
31살, 나와 남편은 세상일에 초보였다. 집을 살 때 받는 담보대출 개념도 없는...
♡♡ 그림은 젠탱글로 내가 물감으로 색칠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