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천이야기 12- 요양원에 계신 엄마
엄마는 작년 여름에 혼자 사시던 주덕에서 집을 팔고 하남 요양병원을 거쳐 하남의 한 요양원에 계신다.
지금 계시는 요양원에 대하여 불평이 많지만, 그래도 여기만 한 곳이 없다고, 다른 곳에 가도 다 똑같다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요양비는 월 100 여 만원에서 올해는 20% 올랐다.
엄마의 요양비는 모두 엄마가 부담한다.
200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공무원 유족 연금을 받는데 그 돈의 대부분을 적금을 넣어 목돈을 만들고 1000 만원이 되면 5명의 자식들에게 첫째부터 차례로 나누어주셨다. 형제들은 1000만 원씩 두 번이나 받았다.
생활비는 주로 내가 매월 보내드리는 용돈과 다른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 해결했으며, 텃밭의 채소를 길러 이웃에게도 나눠주시고 배추와 무, 감자, 고추 등 채소를 키워 김장을 해서 나눠주셨다.
한 달에 한번 내가 방문하면 떡과 과일 등의 식품과, 요구루트, 커피, 율무차, 사탕 등을 사서 냉장고를 가득 채워드렸다.
또 필요한 옷가지들과 갈치, 떡, 수수부꾸미 등은 온라인으로 구매하여 보내드렸다. 동생들도 갈 때마다 필요한 것을 사드리곤 했다.
엄마는 이웃들의 농사에 조금씩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감자 선별, 파 다듬기, 콩 고르기등 소소한 일을 돕고 그런 것들을 얻어오기도 했고 , 쌀, 감자, 옥수수, 마늘 등 이웃의 농산물을 품질이 좋다며 사서 자식들에게 나눠주셨다.
아버지께서 생전에 내가 죽고 당신 혼자 남으면 이렇게 살라하면서 맨 마당을 일구어 텃밭도 만들고 담벼락을 따라 꽃밭을 만드셨다고 했다.
대문옆엔 인동덩굴을 심어 대문을 타고 오른 인동초 꽃이 향기를 뿜는다. 여름엔 금낭화, 붓꽃, 봉선화도 흐드러지게 핀다. 가을에도 들국화 등의 각종 야생화와 야래향 하얀 꽃이 손님을 맞이하고 부추, 참나물도 매년 저절로 나서 엄마집을 갈 때마다 한 봉지씩 잘라온다.
텃밭엔 사시사철 어떤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엄마는 훤하다. 봄에는 상추와 가지, 고추, 쑥갓, 아욱, 오이, 토마토, 부추, 호박 등이 텃밭을 가득 메운다. 너무 자라서 엄마는 이것들을 교회에 가져다주고, 이웃에도 나눈다. 자식들이 오면 너나 할 것 없이 박스로 담아간다. 엄마는 이런 나눔을 즐기셨다.
엄마는 산골 출신이라 산나물을 채취하는 데 거의 전문가다. 젊은 시절엔 산에서 각종 산나물을 채취해 나물을 해주셨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민물고기도 잡고, 다슬기를 양동이로 가득 잡아와 국을 끓여 주기도 하셨다.
엄마의 다슬기국- 충청도에선 올갱이국이라 한다. 이 올갱이국은 엄마 솜씨가 최고다. 갓 잡은 올갱이를 껍질째 된장을 넣어 삶고 그 물을 버리지 않는다. 그 물에 부추와 근대 아욱 등의 각종 야채를 텃밭에서 막 뜯어다 넣고 끓이다가 올갱이 살을 발라놓은 것을 밀가루에 버물려 끓는 국에 살짝 넣고 불을 줄인다. 그렇게 밀가루들이 익으면 푸른빛이 도는 올갱이국은 점말 맛있다.
괴산에서 살 땐 여름엔 거의 날마다 먹었다. 나와 엄마가 집 앞 큰 개천에서 잡아왔고 엄마가 올갱이를 삶아서 건져주면 아홉 살 어린 나는 바늘로 속살을 파냈다. 한 대접은 되어야 국을 끓일 수 있는데, 엄마에게 들키지 않게 바늘로 가득 속살을 꿰어 입에 다 털어 넣었다. 아, 그보다 맛있는 게 있었을까!
엄마에 대한 추억 중 단연 이 추억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한다.
그 올갱이 맛에 늘 올갱이국 어쩌구 써 놓은 식당을 돌았지만 늘 실망해서 더 이상 속지 않겠다고 포기했다. 그러다 지난해 괴산 어느 관광지에 들렀다가 똑같은 올갱이국을 드디어 찾았다. 남편도 장모님 솜씨와 똑같다고 좋아했다. 올갱이국 먹으러 거길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좋았다. 엄마의 올갱이국은 괴산식 올갱이국 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봄에는 교회 뒷산에서 두릅을 꺾었다면서 주셨고, 도라지를 텃밭에 심어 뽑아가라고 하시기도 했다. 들판에서 냉이와 쑥 등 각종 나물을 채취해서 삶아서 냉동시켰다가 주셨고, 고들빼기김치와 간장에 절인 고추장아찌도 매년 해주신 품목이다.
또 도토리를 주워와 도토리묵을 만들어 주셨고, 겨울이면 팥을 한 말씩 사서 팥죽을 쑤어주셨고, 김장 김치로 만두를 만들어 냉동시킨 후 가져가게 하셨다. 자식들은 잡채대신 라면을 부숴서 넣은 이 만두를 아주 좋아했다.
방앗간 운영으로 하지 못했던 각종 음식들을 오히려 노년에 더 많이 해 주셨다.
그리고 매일 동네 경로당에서 고도리 화투를 치셨는데 함께 하던 할머니들이 다들 돌아가셨다. 그래서 80대 후반의 엄마보다 젊은 70대들이 이 경로당을 차지했고, 엄마는 손님처럼 대접받다가 불편하다면서 더 이상 가지 않으셨다.
그래서 홀로 산책하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늘 대문 앞 의자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셨다.
마을 사람들은 엄마가 그렇게 대문 앞에 앉아 계신 것이 안쓰러웠다고 말한다. 비타민D가 중요하다면서 햇볕 쬐기를 해야 하니 산책을 하라고 전화 때마다 자식들이 말해서 햇볕 쬐기를 한 것이라 하셨다.
그러다 2023년 4월 3일, 그날도 역시 이웃집에서 무언가 도와주려고 하다가 계단에서 넘어지셨고 허리에 금이갔다. 엄마는 집계단에서 내려오다가 그리됐다고 움직일 수가 없으니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늦은 밤에 전화하셨다. 자식들에게 공연히 남의 일을 도왔다고 한 소리 들을까 봐 그렇게 말했다고 하셨다.
그렇게 엄마의 자유로운 삶은 끝이 났다. 한 번의 낙상이 결국 요양병원을 전전하게 했고 방문 요양사의 도움을 받다가 끝내 요양원으로 마지막 거처를 옮기게 하였다.
집을 팔고 요양원으로 오셨으니 집값도 제법 된다.
정기예금에 일부 넣고, 내가 주식투자도 해드린다.
덕분에 자녀들이 엄마의 요양원비용이나 병원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자식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한테 용돈을 받는다. 또 주식 수익금으로 자식들에게 100만 원도 주고 200 만원씩 용돈도 준다.
이번에도 손주가 대학에 합격했다고 100 만원을 주셨고, 엄마보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엄마의 큰 아들, 내 남동생을 위해서 매달 50만 원씩 생활비를 보낸다.
물론 엄마의 경제는 내가 대신한다. 요양비를 내고, 친척들 경조사비와 자식들에게 용돈을 보내고, 주식투자로 자산을 불리기도 하면서...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은혜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다. 유족연금은 아버지가 학교의 기사로 근무하면서 평생의 자존심을 헌납한 결과가 아닌가!
이것이 없다면 엄마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더 고단했을까? 간병파산도 있다는데...
엄마는 동의하지 않으신다. 당신이 아버지를 학교에 취직하도록 강요했으며 사직서를 낸다고 하고 한날 술에 취해 비명처럼 말씀하셨어도 끄덕도 안 하고 이혼하겠다고 버텼으며, 퇴직 때도 일시불로 받아 투자하자는 아버지의 동생들 꼬임에 맞서 싸운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살려고 그렇게 억척스럽게 싸웠나 보다' 하신다.
50~60대 동생들은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폭력적인 언행만 그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다.
나 역시 그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아버지가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좀 더 살아계셨으면 좋은 음식도 사드리고 여행도 함께하며 좋은 추억으로 이별했을 텐데..
♡♡ 아직 작가로서 부족함이 많다. 글도 서툴지만, 편집도 쉽지 않다. 사진이 언제는 중간에, 언제는 끝에 놓인다. 내맘대로 할 수가 없고, 삭제 방법도 모르겄다.
그림은 남편이 기르는 호야의 한 종류로 디시디아필리핀 이름표를 달고 있다.
사진은 두물머리 두물경 풍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