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천이야기 13 - 최악의 선택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괴산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시며 사셨고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4살 어린 여동생과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방학 때마다 갔다.
할머니는 반갑게 맞이해 주시면서 고추장에 박은 더덕 반찬을 주셨다. 어찌나 맛있었는지 할머니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다 사라졌다.
내가 예닐곱 살 때 할머니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는 내게 우리 엄마 흉을 달고 사셨다. 내가 누우면 어린것이 지 애미를 닮아 게으르다면서 혼을 내셨고 청소를 시키면서도 똑같은 말을 하면서 제대로 못한다고 꾸짖으셨다. 난 우리 엄마는 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늘 일을 했다. 토끼먹이로 질경이와 아카시나무잎, 클로버-우린 이 클로버를 토끼풀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것들을 할아버지가 만드신, 싸리로 만든 끈이 달린 항아리 모양의 바구니에 가득 뜯어왔다.
좀 더 커서는 할머니 디딜방아를 밟으며 고춧가루, 떡가루 만드는 일을 도왔고, 할아버지가 쇠죽을 쑤기 위해 볏짚을 작두로 썰땐 작두를 밟기도 했다.
작두에 할아버지 손을 다치게 할까 조마조마했다.
마른 콩대로 아궁이에 불을 때기도 했고 겨울엔 산에 가족들과 함께 나무를 했다. 낙엽을 긁어모으기도 했고, 큰 나무토막에 칡덩굴로 끈을 만들어 주면 그걸 끌고 산을 내려오기도 했다. 또 콩이나 들깨, 참깨, 수수 등 곡식을 추수하면 마당에서 멍석 위 곡식들을 도리깨질하며 도왔다.
내가 서울에 와서 살면서 어릴 때 이런 농사일을 했다고 하니 다들 놀랐다.
50대 부장교사로 문해교실을 운영하며 평균 71세 어르신들을 가르칠 때도 그분들의 문화를 훤히 이해했고 잘 통했다.
농촌에서 전형적인 시골 농부와 목수의 일을 하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가 2층 양옥집을 사게 되자 괴산의 집과 땅을 팔고 제천집으로 오셨다.
효자 아들 K장남의 효심이었다.
그러나 큰고모는 그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한다.
부모님의 만년을 가장 절망적이게 만들었다고...
나도 동의했다 최악의 선택이었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갑자기 일을 잃으셨다. 할아버지는 집 마당이 꽤 넓은 것을 보고 오리와 닭, 개를 기르셨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이 냄새난다고 항의했고, 엄마는 할아버지께 모두 치우라고 화를 내며 아무것도 못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제천 중앙시장통 다리에 가셨다. 거긴 비슷한 사정의 할아버지들이 모여계셨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면 돌아오셨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제천에서 2년 살았는데,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서 팔짱을 끼고 돌아오면 그 모습을 본 친구분들이 다들 부러워하며 칭찬을 했다. 할아버지는 "그렇지요, 그럼요 " 하면서 허허 웃으셨고 손녀딸을 자랑스러워하셨다.
당시 방앗간 일을 돕던 나는 방앗간에서 돈을 몇 천 원 가져와 할아버지께 드렸고, 중앙시장에서 호떡이나 부침개, 만두 등을 사다 드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2층 옥상에 올라가 하루 종일 길가는 사람들을 구경하셨다.
이 두 분을 보살핀 것은 네 살 아래 나의 여동생이었다. 엄마는 시댁식구들에 대한 분노가 늘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앗간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일이 많아서 시부모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중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이 집안 살림을 다했고 엄마처럼 동생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를 돌보게 된 것이다.
효자 중 효자인 아버지는 출근하거나 퇴근하면 무조건 할아버지 할머니방에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방이 따스한지 무얼 드셨는지,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
하루 종일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던 할머니는 드디어 있었던 일을 고자질하셨다.
손녀딸 누가 사탕을 혼자 먹더라, 라면을 끓여서 자기들만 먹더라...
그날 우리 집엔 화산이 폭발한다.
방문을 나오면서 "누구야" 하시고 그 두꺼운 손바닥이 내 동생들의 머리를 타격했다. 엄마가 이것을 따지고 대들면, 아. 그날은 피를 보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어쩌다 한번 아버지가 엄마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닭을 전기구이 하듯 엄마의 손과 다리를 한꺼번에 움켜쥐고 내동댕이치고 발과 손으로 마구 때리셨다. 방바닥엔 피가 흥건했고 엄마는 응급실로 실려갔다. 난 단 한번 보았지만 동생들은 여러 번 본 모양이다.
어찌 이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자식과 마누라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부모는 오직 한 번이라 평생 섬겨야 한다고 수없이 말씀하셨다.
장남이라 동생들을 자신이 챙겨야 한다면서 고모 삼촌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으셨다. 고모들도 큰 병이 나거나 수술해야 하면 우리 집으로 오셨고 엄마의 의료보험으로 병원 치료를 받으셨다고 했다. 그 뒷바라지도 내 동생이 했다.
큰고모는 그런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수없이 말했고, 병원에 문안 오지 않은 우리 엄마에게 서운해했다. 아버지가 절대 병원 근처도 오지 말라고 한 사실은 모르셨나 보다. 엄마의 의료보험증을 사용한 것은 위법이며 직장을 잃고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인지도 모르고...
당시 고모들은 의료보험이 없었다.
아버지의 동생을 위한 위법은 이뿐만이 아니다. 청년시절 사시를 준비하는 동생을 위해 남의 소를 훔치다 들켜 실제 경찰서도 다녀오셨다고 했다.
또 그 동생의 취직을 위해 고등학교 졸업장도 만들어 주었다고 엄마가 말했다. 작은 아버지는 그 졸업장으로 금융기관에 취직하여 아파트도 사고 집안을 일구었다. 이 일을 고소하지 마시라. 이미 두 분이 고인이 된 지 십수 년이 지났으니까.
부모와 동생들에 대한 K장남의 의무감은 위법을 불사했지만, 공부 잘하는 딸한테는 고등학교에 가지 말고 공장에 취직하여 집안을 도우라고 했다. 자식은 소유물이고 도구였다.
농경시대 잘못된 유교적 관습을 맹신한 탓이리라.
엄마는 아버지한테 월급을 받아 본 적이 없단다. 방앗간 수입으로 우리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감당했다고 하셨다. 적금을 들어 만기가 되면 귀신같이 시댁에 뭔 일이 생겼다고, 그래서 다 가져갔다고 지금도 굳게 믿는다.
그러나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아버진 고모들이나 엄마의 시댁 식구들과의 금전관계를 일절 공유하지 않으셨다. 시댁뿐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경제활동에 대하여도 공유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얼핏 들은 이야기를 의심의 눈으로 믿었고, 당신의 정제되지 않은 분노를 자식에게 쏟아냈다.
고모들은 오히려 너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방앗간을 샀냐면서 다 고모들이 준 돈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육촌형까지 돈을 빌려가서 아직도 갚지 않았단다. 예전엔 300만 원을 빌려갔다고 했는데, 최근엔 1000만 원이라고 한다. 엄마의 기억을 다 믿을 수는 없다.
동생에게 확인하니 600만 원이라고 한다. 1997년경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갈등이 많았는데 결국 연금으로 하기로 하고, 남은 퇴직금 600 만원을 그 아저씨가 오셔서 빌려갔고 아직 갚지 않았단다.
무엇보다 진실을 정확히 아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객관적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내가 대학을 다니게 되어 다시 서울로 와서 가끔씩 제천에 가면 할아버지는 동네 어귀까지 따라오며 어서 가라고 눈물짓고 손을 흔드셨다.
경로사상이 땅에 밟히기 시작한 시대, 집안어른의 권위를 고향에 두고 온 할아버지가 참으로 안쓰러웠다.
내 동생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이다.
할머니의 고자질로 가정 폭력이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3년 후, 1985년 6월에 할머니를 따라 돌아가시기까지 나의 여동생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평생 한복만 입으셨던 할아버지는 유일한 말벗인 할머니의 부재를 감당하지 못하셨다. 그래서 괴산 할머니 산소에 가셔서 큰소리로 자주 우셨다고 다들 이야기한다.
그리고 치매가 왔는지 솜바지에 수시로 소변을 보셨단다. 온수도 나오지 않는 마당의 수돗물에 바지저고리와 이브자리를 맨손으로 빨아야 했던 내 동생... 내 대신 고생한 동생에게 늘 미안하다. 엄마도 뒤늦게 둘째 딸이 고생했다고 미안하다며 당신의 귀금속을 주었다고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오셨을 때는 지금 내 나이보다 젊으셨다. 할머니가 충분히 집안일을 돕고 손주들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집안일을 하는 것은 수치이며 불효라 여기던 시절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따슨 방에서 생활하게 한 아버지는 그게 효자의 도리라 믿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시절이다.
제천보다 그냥 괴산에서 더 사셨으면 어땠을까?
할아버지 할머니로 , 우리 엄마가 주덕에서 텃밭을 일구며 사셨듯이, 그렇게 90대 노부부로 20년은 더 행복하게 사셨을 것이다.
두 분은 7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도시 삶이 버거우셨을 것이다. 또 당신들 때문에 늘 큰 싸움이 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시어머니가 되어보니 알겠다.
부모 앞에서 싸우는 자식들을 보는 일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우리는 지금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20여분 차를 타고 갈 거리 18평 아파트에서 혼자 사신다.
그래서 종종 반찬과 과일 등을 가져다 드리고 속옷, 양말 겉옷까지 사다 드리고 집안의 모든 행사를 함께한다.
한때 함께 살았는데 시어머니와 우리 가족 모두 힘들었다. 우리도 이런저런 이유로 민감해졌고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같은 집에서 모시는 것만이 꼭 효가 아니다.
당시 아버지는 모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