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속물이 아니다
여자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어젯밤 꿈을 생각했다.
너무 선명한 꿈이다.
하얀 양복을 입은 의사가 하얀 승용차를 타고 교문을 질주하여 우리 대학 강의동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러면서 여자에게 차에 타라고 차문을 열었다.
차를 타지 않았다. 꿈속에서도 놀랐는지 바로 꿈을 깨웠다. 여자가 기억하는 꿈은 그게 전부다
며칠 전에 교대 국어과 강사가 자기 친구를 여자에게 소개하겠다고 했다. 아직은 월급의사라고 했다. 한번 만나보라고 한다. 그게 꿈을 꾸게 된 원인일 것이다.
사실 소개를 받고 반응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겠다면서 감사의 인사만 전했다.
의사가 왜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하겠는가? 의사와 결혼하려면 열쇠가 몇 개 필요하다고 하던데. 그런 사람들이 소개팅을 한다고?
우리 집에 가면 십리는 도망갈 텐데...
국어과 강사가 여자를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꿈을 꾸다니, 여자는 자신이 속물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그 소개남에 대하여 아는 정보는 단 하나 직업뿐이다. 그 신학생과 헤어지고 의사라는 직업에 흔들려서 이렇게 꿈까지 꾼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여자는 자신의 무의식에는 속물근성이 가득하다면서 웃었다.
어젯밤에는 교회 청년회 예배가 있었다. 목사는 고린도 후서 6장 14절을 설교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의사가 믿는 사람이란 증거가 없다.
영적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르면 삶의 방향이나 자녀 교육, 신앙 등에서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반드시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여자와 결혼을 하겠는가. 여자의 집에는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다. 여자 혼자 교회를 다니다가, 여자가 제천에서 2년 사는 동안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동생들을 데리고 다녔다.
믿는 사람들은 상대 부모가 장로, 집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아무런 정보 없이 단지 의사라는 직업이 상징하는 부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것에 끌렸고, 여자의 무의식은 벌써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꿈까지 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속물근성을 온전히 내쳐야 한다.
더 이상 흔들리면 안 된다. 자신의 결정이 흔들리기 전에 스스로 단단히 묶어야 한다. 번복할 수 없도록.
한 달 전에 헤어진 신학생에게 아침을 먹고 전화를 했다. 그 남자는 여자를 온전히 받아 줄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신앙도, 가정환경도 꺼릴 것이 없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두번째 만났던 날, 교대 담을 지나면서 불러준 송창식의 노래가 아직 귓가에 남았다. 그는 몸을 굽히면서 뱃속에서 부터 우러 나오는 진심을 호소했고, 여자는 그 어스름한 저녁을 가르는 남자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남자는 아래층에 사는 주인집 아저씨가 전화받으라는 소리에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아래층으로 달리듯 뛰었다. 늦으면 끊어질지도 모른다. 여자다. 여자가 다시 만나자고 전화한 것이다.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그동안 울분에 차서 원망한 일이 눈처럼 녹았다. 다 용서하리라. 사랑스러운 여자,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었던 그 여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역시 여자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미련을 보이지 않고 보내 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헤어질 수 없다고 매달렸으면 여자는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래 여자들은 그렇다.
남자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면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이별이 너무 괴로워서 장학금을 술로 다 허비한 것이 아까웠다. 기다리면 이렇게 연락이 오는데, 믿음이 약했다고 후회했다.
그럼 그렇지,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은 여자와 헤어지다니 말이 안 된다고 되뇌었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계속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여자는 남동생과 함께 나왔다. 고깃집에서 돼지갈비를 먹었는데 여자가 미안하다면서 샀다.
남동생이 같이 나온 것이 이상했지만 가족을 소개하는 것이리라.
식사가 끝나고 탁구장으로 가자고 한다. 헤어진 적이 없는 연인 같이, 일상적인 대화만 오갔다.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고 한 달 만에 처음 만난 것인데, 예상한 분위기가 아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다시 만나자고 전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타가 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늦잠 많은 내가 매일 새벽기도를 하며 살겠다고? 교회 예배가 끝나면 웃음을 머금고 성도들에게 인사하며 은혜 넘치는 표정을 짓겠다고? 그게 가능해? 끔찍한 일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떻게 하나?
여자는 동생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연애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된다. 어제 만난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친구사이가 되는 거야. 쿨하게.
여자는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다면서 탁구장에 가서 탁구를 치자고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장난해?
처남, 미안해. 먼저 들어가. 누나하고 이야기 좀 해야겠어.
여자는 그 순하고 착했던 남자가 화를 내자 놀랐다.
이러려고 전화한 거야?
여자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는 남자에게 대응할 말이 없다.
남자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했다. 하루하루 울분이 넘쳐 장학금 10만 원을 술로 다 마셨다. 너무 괴로워서 다 잊자고 마음을 정리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전화를 받아서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잔뜩 기대하게 해 놓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웃고 헤어지자고?
말이 안 된다.
남자에게 장학금 10만 원은 한 달 생활비를 능가한다. 그는 동생이 월 5만 원을 보내주어 그것으로 산다고 했다. 그런데 그 돈을 술로 탕진했다니 마음이 아팠다.
다 잊자고 한 사람을 왜 흔들었을까.
기대에 차서 한걸음에 달려온 남자를 생각하니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가벼웠다. 좀 더 심사숙고했어야 했는데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헤어지는 일도 쉽지는 않았었다.
한 달 전 토요일에 느닷없이 남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남동생을 소개하고 싶어 했었다. 교대생은 신붓감 후보 1위였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볼까 봐 가슴을 졸였다. 남자가 자취방까지 찾아오다니,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여자는 여기서 끝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근처 카페로 갔다.
여자는 헤어지기 위해 먼저 벽을 치고, 자기 비하를 통해 헤어짐을 유발했다. 남자는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여자가 사생활이 복잡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여자는 신학생이라 다르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여자가 자기와 헤어지고 싶어 하는 것을 눈치챘다. 표정이 전 같지 않다. 카페에 앉자마자 여자는 다리를 꼬고 먼 곳을 한참 응시했다. 눈빛이 차갑다. 여러 가지 말을 하는데 요약하면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번 헤어진 여자 친구처럼, 남자의 가난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헤어지자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갈등이나 다툼이 없는 이별이었다. 기도의 응답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고 여자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전화가 온 것이고. 평생 쓸 행운을 다 받았다고 생각했다. 희망이라는 천사가 남자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또 헤어지자고? 이번엔 아니다. 절대 보낼 수 없다.
남자의 진실하고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기 어렵다.
남자의 눈 속엔 이미 여자가 가득찼다. 반드시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의지가 넘친다.
어젯밤 설교가 문제다.
그 꿈이 문제다.
내가 미쳤지...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거야?
여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들은 다시 몇 번 더 만나기로 했다.
※ 이 글은 자전적 소설로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