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병상련
남자의 일기장을 봤다.
주인아주머니 원피스를 빌려 입고 간 날이다.
남자는 친구와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여자가 가자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언가 대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방 밖으로 나갔다. 혼자 방을 둘러보는데 철제책장이 벽 한쪽을 가득 메웠다. 주로 신학책과 세계 명작, 철학서들과 사회과학책들이 있었다. 원서를 복사하여 제본한 책들도 많았다.
맨 아래 책꽂이에는 오래된 낡고 색 바랜 수첩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있다. 순간 일기장이란 생각이 들었고 호기심이 생겼다.
남자는 중학교 1학년때부터 일기를 썼고 한 권도 버리지 않고 모으고 있다고 했다.
한 권을 빼서 펼치자 그의 중학생 시절이 영화처럼 자세히 그려졌다.
친구들과 냇가에서 고기를 잡은 이야기, 미꾸라지를 양동이로 가득 잡아 엄마와 시장에 팔러 갔는데, 값을 쳐주지 않아 집으로 가져와 추어탕을 해 먹었다는 이야기 등이 그의 10대를 이야기했다. 여자도 냇가에서 올갱이를 잡아 올갱이국을 끓여 먹었는데 같은 시대를 살아서 경험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일기장에는 재미있는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알코올과 가정폭력도 자세히 그려졌다.
막걸리를 사 오라고 해서 심부름을 갔다가 넘어져 주전자에 든 술을 쏟았는데, 이웃 아주머니가 울고 있는 어린 남학생에게 다시 술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이웃 아주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을 알고 있기에 그대로 돌아가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기 때문에 도움을 준 것이라고 썼다.
사실 여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여자는 연탄을 사러 연탄공장에 갔었다. 연탄공장에서는 연탄을 새끼줄에 꿰어서 판다.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연탄을 샀다. 양손에 두장씩 연탄을 꿰어 들고 오는데 돌부리에 넘어졌고 연탄이 깨졌다. 여자를 도와준 사람은 없었다. 덜 깨진 연탄 두장을 다시 꿰어 가지고 갔고, 엄마는 그것도 제대로 못하느냐고 저걸 아까워서 어쩌냐면서 화를 냈다. 연탄이 아까울뿐 딸이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나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자의 실수를 덮어줄 따스한 어른은 없었다.
남자의 일기장에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사건과 폭력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눈물이 났다.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 여기 있구나. 여자는 동병상련의 깊은 연민을 느꼈다.
여자는 강한 사람을 만나면 공격성이 살아나 방어태세를 한다. 상대를 날카로운 언어로 몰아붙이며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상대의 약점이 파악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세를 높인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에게는 한없이 자상하다. 약한 사람들에 대한 헌신은 자신을 참 좋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고, 강한 사람에 대한 공격은 자신이 정의롭다는 만족감을 준다.
일기장 속의 남자는 여자가 품고, 달래고, 상처를 치유해줄 대상이었다. 여자의 사랑은 연민으로 시작한다.
민중의 딸과 민중의 아들이 만나, 일을 한번 내보자고 여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남자는 4년 내 대학교에서 1등을 했고, 성적우수 장학금으로 공부를 한다고 했다. 남자가 자랑할 유일한 것이란다.
여자는 사모 말고 대학교수 부인이 되기로 했다.
교사로 취업하면 돈을 벌 수 있고, 그를 박사까지 만들 계획을 했다. 박사만 되면 저절로 대학교수가 되는 줄 알았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뎌야 하는지 그때는 몰랐다. 연민과 정의감만 충만했다.
※ 이 글은 자전적 소설로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