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문학, 감정은 파도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했던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조지훈(1920~1968)의 시 「사모」 중, 일부 발췌
국문학과를 가고 싶었던 과거
끝내 학업의 길을 잇지 못하고 문어잡이 배의 선장이 된 고석길, 촬영 기준 쉰셋이었다.
2015년 8월 23일, KBS 다큐멘터리 3일 415화
(공식 유튜브 링크)
영상을 보지 않았던 분들은 짧게 보시는 걸 권장드립니다.
선장은 ‘사모’를 암송하며 '너와 나의 영원했던 사랑을 위하여'라고 외는데,
원래의 문장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이다.
‘영원’이란 단어는 과거형으로 존재할 수 없는 단어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영원'이라는 단어는 과거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했으나 지금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건 그냥 유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한했던 단어는 세월이 만든 피부의 균열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바다 바람의 소금기를 머금고, 그의 사무치는 눈동자와 텁텁한 입술을 적시며
‘영원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사랑’으로 마침내 의미를 맺었다.
방송 이후, 선장은 2022년 한 업체의 협력을 통해
‘낭만어부 고석길전’이라는 이름으로 시 낭송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은 바다 위 84일간의 여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문학으로 승화되었다.
제주도의 관식 역시, 드라마 속 인물이지만
누군가의 아버지 또는 사랑했던 남자의 기억으로 따듯하고 아련한 감정들을 다시 꺼내게 했다.
그들의 삶은 문학이 되었고, 바다로부터 쓰였다.
문학은 땅 위에서 쓰였지만, 그들은 바다를 통해 그보다 더 깊은 글을 쓰고 있었다.
낭만은 빛나는 포말이 아니라, 밀물에 가라앉은 그리움에 가까웠다.
규칙적이지만 어딘가 낡아버린 듯한 엔진소리 속에서,
무겁지도, 잔인하지도 않았던 PD의 질문 하나였다.
"선장님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어요?"
고된 일로 지치고, 낡아버린 남자의 심장에 시동이 걸렸다.
낯선 남자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었던 질문 하나가
언젠가 접어뒀던, 먼지 쌓인 책의 접힌 페이지를 여는 것과 같이
그의 가슴을 소리 없이 펼쳤다.
국문학과를 꿈꾸던 푸르렀던 소년은
시대의 파도에 밀려, 파란칠이 벗겨진 배 위에서 노을을 맞게 되었다.
"왜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십니까"
선장은 아물지 못한 상처를, 마음 한편에서 곪듯이 뱉어냈다.
그의 봄의 끝이었을까, 여름의 시작이었을까.
언제 파였을지 가늠할 수 없는 상처는
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 속에도
여전히 곪아있었다.
한철의 때를 기다리던 삶.
그러나 너무 멀리 지나가버린 시간.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하는 원망과 고민, 그리고 후회의 상처가 남긴
조용히 가라앉은, 오래된 딱지였을지도 모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독한 뙤약볕에 바싹 말라버린 걸까.
아니면 뼈를 에는듯한 바닷바람에 베인 걸까.
고단한 바다의 삶에 의해 그을리고 주름진 선장에게서
이형기 시인의 '낙화'는 내게 파도치듯 밀려왔다.
선장의 '가야 할 때'를 상상해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대의 어려움은 '인내'라는 좋은 말 뒤에 가려져, 헤아리기 힘들었고
'희생되어야만 이어질 수 있는 삶이었을까' 의문을 던지는 것조차, 스스로 건방지게 느껴졌다.
가슴속에 감춰진 꿈과 문학은
체한 사람의 손끝을 따듯,
검붉게 체한 손끝의 맺힌 피처럼 올라온다.
'존경'과 '위로'라 적힌 거즈 사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란 걸 보이고 싶은 듯, 새어 나온다.
아물기를 바라며 덧바르던 마음은, 때론 그 바람만큼 더 깊이 베이기도 한다.
바다도 이해한다듯이 그 순간의 그들에게 파도쳤다.
잔잔하게도, 사무치게도 위아래로 그들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꿈은 바다에 풀어졌고, 끝내 닿지는 못했지만
부르튼 입술에서 흘러나온 시는
바다를 문학으로 만들었다.
긴 여정을 지나 도달한 바다의 끝단.
감추어져 있던 해변에 밀려온 파도는
부서지며, 잔잔한 포말로 흩어졌다.
모래사장에 적시고 나서야 겨우,
그의 삶은 문학이 되었다.
빛나지만, 조금은 서글픈 흔적으로 남겨졌다.
문학에서 가장 멀리 있을 것 같았던 선장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잠기게 했다.
먹먹하지만 짙게 스며드는,
조금만 늦게 나가면 허리춤까지 차버리는
밀물을 맞이한 갯벌처럼.
부딪히고, 흩어지고, 부서지는 것들 속에서
문학은 그렇게 생겨났다.
그렇게 살아냈다.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사람마다 바라보는 마음은 다르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바다 앞에 서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