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부림친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새 출판 계약과 기고를 떠올리며 하는 생각들
군 복무 시절 300권 가까운 책을 읽었습니다. 휴가 때면 닥치는 대로 책을 그러모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길든 짧든, 투박하든 진솔하든, 점멸하는 커서 앞에서 좌절하거나 기뻐하며 글을 쓴 시간은 그보다 조금 더 됩니다. 슬퍼서, 막막해서, 궁금해서, 답답해서 읽거나 썼습니다. 부끄러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는 20대 중후반의 불안과 불만을 그렇게 지나왔습니다.
작가나 평론가가 되기를 꿈꾼 적도 있지만, 글로 벌어먹고 살 자신은 없었습니다. 뒤늦은 전역 후 방황 또는 탐색이란 이름으로 몇 번의 이직과 직무변경을 거쳤고, 지금은 스타트업에서 PM 이란 이름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꿈꾼 것은 꿈으로만 남았고, 꿈꾼 적 없던 것은 현실이 된 생활 앞에서, 인생이란 만듦과 흘러감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분의 문장이었던가요. "몸부림친 흔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이직 후 적응을 위해 읽고, 복기하고, 정리하고 글을 쓴 것들이 어느 출판사 담당자님의 눈에 띄어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제 이름이 적힌 책을 냈습니다. 제법 판매가 된 덕에 이번 달에는 선인세를 제외하고도 약소하나마 추가로 정산을 받았습니다.
회사 일과 별개로 공부하던 주제로 얼마 전에는 또 한 권의 출판 계약을 했고, 연말연시를 맞아 어느 플랫폼에 기고한 글은 감사하게도 제법 괜찮은 반응을 얻어 또 한 번의 새로운 협업을 진행 중입니다.
물음 앞에서 늘 읽거나 쓰던 시간이, 어휘와 문장을 고심하던 시간이, 당장의 수요도 없이 혼자 공부하던 시간이, 그러므로 어디에도 덕 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그 몸부림의 시간이, 돌고 돌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저 그 시기와 형태를 모를 뿐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조직 변경으로 인해 지난 2년간 원래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질은 모두 같습니다. 그렇지만 형과 태가 달라진 업무의 탓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일을 할 때 스스로가 만족스럽거나 뿌듯한가?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등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질문이 그렇듯, 단서만 있을 뿐 답은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만 답을 내리기 전까지는, 무엇이 되었든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 합니다. 모르는 걸 알게 될 때까지 읽고, 복기하고, 정리하고, 쓰는 일을요. 그 몸부림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언제고 제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찾아올 것임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요.
PM이든 기획자든 지금 현재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혹은 무엇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몸부림도 헛되지 않을 겁니다.
학창 시절부터 좋아하던 가수의 노래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Those wasted nights are not wasted. I remember every one. (헛되이 보낸 줄 알았던 밤들도 실은 그렇지 않아. 내가 모두 기억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