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커리어도 계란 바구니가 필요합니다
진심이기에 나눠 담는다
대학시절 통역을 전공했습니다. 그 흔한 이중전공도 제쳐두고 '올인'을 했습니다. 일어나서는 혀를 풀며 하루를 시작했고, 도서관 계단을 오르내리며 혼잣말로 영어를 하고, 꿈도 영어로 꾸곤 했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날엔 좌절감 또는 수치심에 방에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진심이었거든요.
그러나 통역사가 되지 않기로, 혹은 그러지 못하게 된 이후로 갈 곳이 사라졌습니다. 학과장 교수님의 면담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늘 플랜 B가 있어야 한다." 진심이면 안 되는 일은 없다고 해주실 줄로 알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어 외엔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던 무능한 학생이 제 몫의 밥벌이를 하기까지 그 뒤로 5~6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영어에만 몰입한 탓에 그 흔한 리서치, 리포트 작성 한 번 안 해보고 대학을 졸업했거든요. 꿈과 진심 뒤에도 출구전략이, 리스크 관리가 필요함을 깨닫지 못한 값을 제법 길고 비싸게 치렀습니다.
그 뒤로 언제나 두 가지의 옵션을 만들어두려 합니다. 여기서의 실패가 제 모든 것의 실패가 되지 않고 싶어서요. 어디선가는 저를 못 미덥게 여겨도 다른 어디선가는 쓰임이 있을 수 있도록요. 어디선가 방황해도 다른 어디선가는 확고할 수 있도록요.
본업이 있고 부업이 있습니다. 낮에는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저녁엔 주로 글을 씁니다. 본업의 직무도 자주 바뀝니다. 운영부터 운영관리, 서비스기획, GrowthPM을 거쳐 지금은 조직의 데이터 역량을 진단하고 가치를 창출할 방법을 궁리 중입니다. 지금 여기의 것 말고도 늘 다른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무엇 하나에도 진심이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진심은 생각만큼 선명하거나 순도가 높지 않습니다. 50~60도는커녕 16도 소주에도 취하는 게 사람입니다.
'진심'이었던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올인이 가져다줄 기회를 알지만, 여러 바구니에 계란을 나눠 담은 포트폴리오의 안정감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의 포트폴리오에는 커리어만 있지 않고, 커리어의 포트폴리오에도 단 하나의 조직, 단 하나의 직무만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언제나 여러 개의 바구니가 필요합니다. 불순하기에 몰아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기에 나눠 담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