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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터 Oct 27. 2021

기획자에게 좋은 질문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세상 모두에게는 귀납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이직. 그리고 나는 다시 귀납적이고 지엽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얼마 전, 산업과 도메인, 직무가 모두 바뀌는 이직을 했다. 정년 보장 또는 고연봉을 보장받은 공직 또는 일부 전문직을 제외하고는,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이직과 전직이 더 잦아지는 시대. 논리적 사고력과 문제해결력 등의 소프트 스킬 soft skills 만 동일하다면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10명 남짓한 구멍가게가 50명 남짓한 동네 하모니마트 정도가 되어가는 첫 스타트업에서의 2년 동안, 당시 대표님이나 다른 동료들이 말하던 기획자의 사고, 연역적 사고에 익숙해지고자 노력했으니까


   나름 그게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던 즈음에는, 누군가의 뜬금없는 아이디어엔 목적과 가설, 전제를 다시 정리하여 짚어달라고 했고, 조금이라도 흐름이 튀는 이야기가 발생하면 쉬이 피로감을 느꼈다. 중구난방으로 튀어가는 대화의 흐름을 정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배경과 맥락은 익숙했고, 암묵지로 깔려있는 전제도 알고 있었으니까. 질문의 형식을 띈, 그러나 질문이 되지 못하는 서술을 구분할 줄도 알았다.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같은 조직 내에서 히스토리와 운영 전반을 알고 있으면서도 팀과 직무가 변경될 때에도 쉽지 않았던 적응이었기에, 산업과 직무, 방법론이 모두 바뀐 지금, 적응의 단서는 요원하기만 하다. 그리고 내가 이전의 동료들에게 던졌던 피드백을 그대로 받기 시작했다. 


"방법이나 아이템은 전혀 본질이 아닌 거 같아요."
"질문이 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그다음에 방법이 있을지 물어보시면 됩니다."
"지금 묻는 건 너무 지엽적인데요."
커리어의 3가지 축인 산업 / 직무 / 방법론 or도메인이 모두 바뀌는 이직을 해버렸다.



기획하는 이에게 요구되는 '연역적 사고'와 '좋은 질문'


   잠깐 과거 이야기. 나의 첫 직장은 시킨 일을 제 때에 맞춰 제대로 하는 '시늉'을 하면 되는 곳이었다. 재단과 임원진의 결정에 맞춰 합법적인 행정절차에 맞춰 기안을 작성하고, 무언가를 하긴 했다는 증거를 남기기만 하면 되었다. 행동과 문서는 많지만, 고민은 길거나 깊지 않았다. 기획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싫어 스타트업으로 이직 한 뒤로, 매 순간이 고민과 기획의 연속이었다. 입사 첫 달에 하루에도 적게는 몇 천만 원, 많게는 억 단위의 기안을 올리던 때에도 하지 않던 기획을, 아직 시장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고객을 위해 며칠이고 해야 했다. 무엇이 우리의 서비스의 핵심을 잘 설명하느냐며, 웹페이지에 실릴 신규 서비스의 설명에 실릴 단어 하나를 두고 씨름하느라 팀장과 밤을 새우던 날도 있었다.


   그즈음, 시중에 팔리는 '기획'과 관련된 책은 모두 그러모았다. 기획의 정석, 기획의 노하우, 기획의 고수 등등. 사례도 다르고, 문장도 달랐지만 핵심은 모두 비슷했다. 배경과 맥락, 목적을 생각할 것. 왜 why 하는지 고민할 것. 그리고 모두가 Simon Sienk의 Golden Circle (WHY > HOW > WHAT)을 찬양했다. 어떤 이는 이를 컨설턴트식 사고, 연역적인 사고, 또는 논리적 사고라고도 했다. 


그렇게 어느덧 < 기획자의 사고 = 논리적 사고 = 연역적 사고 >라는 믿음이 생겨버렸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나에게만 그런 건 아닌 듯했다.



귀납적 사고에 대한 오해


   지금 당장 검색엔진에 '귀납적 사고'를 검색해보자. 교육 방법론부터 실험 방법 등에 걸쳐 여러 설명과 예시가 덧붙지만, 거기 어디에도 '비논리적'이라는 설명은 없다. 그러나 얼핏 < 기획자의 사고 = 논리적 사고 = 연역적 사고 >라는 이상한 믿음이 암묵적으로 생겨버린 곳에서, 이른바 귀납적이고 지엽적인 질문은 논리적이지 못하고, 그러므로 기획자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더 나아가 부족함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역적 사고를 논리적 사고라고 믿으며 비즈니스 환경에서 선호하고 지향하는 이유는, 리소스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지, 반대급부인 귀납적 사고가 잘못된 사고라서가 아니다. 


   비근한 예로, "모든 까마귀는 까맣다"는 명제를 검증하기 위해서 연역적 사고는 "모든 까마귀는 까만색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먼저 가설로 세워 이를 일정 수준에서 검증하는 반면, 귀납적 사고는 모든 까마귀를 관찰하여 "까마귀는 까맣다"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둘 모두 언젠가는 진리에 가닿는다. 까마귀는 원래 까만색이지만, 가끔 어떤 이유로 까만색이 아닌 경우가 있다는 결론. 


  다만 모든 게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단지 후자를 택할 수가 없을 뿐이다. 우리는 이왕이면 빠르게 하고 싶기에, 어느 정도 틀려도 되기에, 모든 걸 해볼 순 없기에 연역적 사고를 택하기로 했을 뿐이다.  관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행위, 모든 까마귀를 관찰하기 위해 때로 중구난방으로 다니는 행위가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다.



좋은 질문은 어디에서 오는가, 아니 애초에 질문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돌고 돌은 미괄식 이야기의 끝에, 제목에서 던진 물음을 다시 짚어보자. 기획자로써 던져야 할 좋은 질문은 어디에서 오는가? 본질에 가닿고, 현상을 꿰뚫는 날카롭고도 적절한 질문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아니, 애초에 질문이란 어디에서 오는가?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질문은 오늘 아침 벨소리와 함께 퍼뜩 "유레카 eurka!" 하는 함성과 함께 나타날 수 있는 것인가?

 

   기획을 위한 영감과 가설은 평소의 경험에서 온다. 경험은 평소의 관찰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며 쌓여간다. 보고 듣고 느끼려면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자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어디를 봐야 할지, 무엇을 듣거나 느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다소 중구난방일지언정, 관찰하는 대상이 지엽적이거나, 넓거나. 깊거나, 얕아지기도 한다. 그 시간이 '귀납의 시간'이다. 일단 관찰하는 시간. 그 질문이 번뜩이거나 날카롭지 않을지언정,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알기 위해 우선 무엇이든 그러모으는 시간


   갓 태어난 아이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기도 전에 엄마와 아빠가 들려주는 수 백 수 천 개의 단어와 문장을 먼저 듣듯이. 레고 블록을 처음 쥔 아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알기도 전에 레고는 어떻게 조립이 되는지, 왜 어떤 조각과 어떤 조각은 맞지 않는지부터 경험하듯이. 


그러므로 새로운 모두에게는 귀납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면 무엇이든 봐도 좋다. 무얼 알고 싶은지, 알아야 할지 모른다면 일단 무어라도 알아가면 된다. 그 어떤 추리 소설의 주인공도 범행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나의 가설은 이거야!"라고 외치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건 굳이 기획과 질문, 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커피에 특별한 취향이 없는 사람이라면 동네 커피부터 마셔가면 된다. 몇 번의 허탕과 만족 끝에, 그는 자신의 취향이 크림 커피임을 알게 된다. 영화에 특별한 선호가 없는 사람이라면 영화관 블록버스터부터 보면 된다. 폭격과 잔해가 난무하는 장면이 싫어 찾아간 그다음 독립극장에서, 그는 어쩌면 우디 앨런의 낭만적이면서도 알맹이 없는 서사에 흠뻑 빠진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그 뒤에야 비로소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는 몇 번의 허탕과 실패의 경험 끝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우리는 그런 뒤에야 '좋은' 질문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니 어쩌면 귀납과 연역 너머 중요한 건, 특히 그게 비즈니스와 조직의 환경에서라면

1) 무엇이든 물어봐도 괜찮다는 안전한 분위기 

2) 기존에 알던 고려 포인트, consideration set의 공유

3) 기존의 구성원들이 품던 ~ 지금 품고 있는 질문들의 공유

4) 파편화된 관찰과 경험을 묶어줄(그루핑 grouping) 할 만한 기준에 대한 고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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