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춰보는 밤,

'느림'의 것.

by 윤슬


들춰보는 밤



막연하게 품었던 외사랑,

기약 없이 기다리던 손편지가 보고 싶다.


어둠에 배웅하고 밝음에 끝이 나던 긴 통화와

야속한 추위에도 계속되던 두 발걸음이 아름답다.


빠르지 않음이 애틋하고, 편리하지 못함에 애가 탔던

쉽게 갖지 못 한 어떤 것들.


느리게 오고 닿던, 쉽게 식지 않아 가장 오래 뜨거웠던

시대와 함께 상실된 수많은 열정을 들춰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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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것


어김없이 원치 않은 '빠름'을 좇으며 살아갑니다. 오늘도 헐레벌떡 숨이 턱까지 찼던 하루가 지났습니다. 여유를 부리며 걷고 느리게 지나치는 아름다움의 경치까지 즐긴다면 나 홀로 낙오자가 될 것만 같습니다.


온종일 손바닥만 한 세상에 갇혀 더 큰 세상을 살지 못합니다. 하루에도 수십수백 번씩 터치하는 세상엔 흡수하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래도 꾸준히 먹어둬야 합니다. 나 혼자만 깡마른 바보가 될 순 없으니까요.


되돌아보니 반짝이고 고결한 것들은 모두 내가 좇는 '빠름'에 단 하나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애틋했던 결정체는 모두 '느림'의 것이었습니다.


'더 빠름'으로 얻는 편리함이 이젠 정말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기쁨'으로 얻는 것보다 '아픔'으로 얻는 것이 더 깊고 값진 것처럼. '편리함'으로 얻는 어떤 것보다 '불편함'으로 얻었던 그 무엇들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뛰지 않고 걸어보려 노력합니다. 천천히 걷고 맑은 공기를 씹으며 천천히 지나가는 경치들도 눈에 찍어 간직하고,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뒤도 돌아볼 줄 아는 여유를 붙잡고 '느림'을 다시 소중히 해보려 합니다.



느리게 오고 닿던, 쉽게 식지 않아 가장 오래 뜨거웠던

시대와 함께 상실된 수많은 열정을 들춰보던 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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