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건 자랑이 아니다.

by 윤슬


저는 아홉 살 때, 왕따를 당하게 된 절친을 대신해 대장과 다투고, 다수의 친구보다 절친 한 명을 택했던 대가로 오랫동안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 당시엔 참 억울하고 아팠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일에 동조했던 아이들도, 나를 배신한 절친마저도 어쩌면 어려서 철이 없었던 아이들이 피하지 못했을 당연한 선택이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어려서부터 또래보다 좀 더 감성적이고 정의에 불탔던 제 선택이 비정상적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어찌 됐든 저는 그때 그 뜨거운 배신의 맛으로 사람을 깊게 사귀지 못하고 진정으로 믿고 내 사람으로 두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늘 돌아올 뻔한 결과를 알고도 '정'을 '정의'를 택해서 스스로 손해 보는 일이 여전히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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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은따였지만 어쩐 일로 주변에 친구 몇 명이 생겼습니다. 원래는 일곱 명쯤 됐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사는 게 바쁘다 보니 그중에서도 진정으로 서로를 위하는 친구 몇 만 남게 되었습니다. 몇 안 남은 중에서, 최근 몇 해전 절교를 하게 된 친구가 생겼습니다. 학창 시절 그리고 결혼 전까지는 다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그 친구를 오직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변 모두가 이해하고 맞추며 함께 했습니다.


한 번은 그녀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시내에 있는 작은 치과에 같이 일을 하게 되면서 친구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격이 그리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름 잘 어울려 다니고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동료로 마주하게 된 친구의 또 다른 모습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조금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바로 앞에 환자 분을 두고도 부로 들으란 듯 자기 안의 분노와 화를 다 표출했습니다.


"아~ 나는 이래서 애들이 싫어. 저 징징대는 소리 진짜 짜증나 극혐이야."

"할머니. 안된다는데 왜 우기세요."

"난 불쌍한 척. 감성팔이 하는 사람들 진짜 극혐이야."


친구는 정말 정나미가 똑하고 떨어질 정도로 구린내 나는 말들을 뱉어냈습니다. 그것도 징징대는 아이와 연세 많은 노인과 힘든 사연을 푸념하는 사람들의 면전에 대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정말 모르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자기가 그런 부류를 혐오하여 싫어하고 욕하지만 그녀를 스쳐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자신을 싫어하거나 욕한다는 사실을요. 그녀 없이 혼자 일하는 토요일이면 환자들은 그녀의 행방을 궁금해했습니다.


"아가씨. 그 아가씨는 그만뒀어요?"

"그 아가씨면 xx 씨 말인가요?"

"이름은 모르겠고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맨날 인상 찌푸리고 말 못되게 하는 그 아가씨 말이에요."

"환자분. 우리 병원에 그만둔 직원은 없습니다."

"난 또 그만뒀다고 좋아했는데. 원장님은 그런 직원을 왜 자꾸 쓰시지."


이렇게 말하는 환자 분들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환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선후배나 친구들 모두 그녀의 말과 행동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주변에 오래된 인연은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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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게 있습니다. 그녀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무언가 걸리는 사람처럼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난 싸가지가 없어. 그래서 뭐? 누가 뭐라고 하는 건 신경안 써. 난 당당해. 내가 좋아하는 거 하고 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 거야."

"아이들은 극혐이야."

"불쌍한 척 감성팔이 하는 사람들이 젤 싫어"


그런데 말입니다. 다들 알지만 그렇게 당당하다는 그녀 혼자 모르는 게 있었습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란 말이 있죠. 습관처럼 내뱉는 강한 부정들은 스스로의 결핍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당당하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함께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결핍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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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예전의 그녀의 말이 떠오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썩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닙니다만. 비슷한 말들을 면전에 하는 사람을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진실이 통하는 것처럼 진실되지 않은 것 또한 통하는 법입니다. 누구나 생각은 틀리다며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자기 합리화를 내세워 기본 윤리 따위는 무시하는 언행은, 같은 자리에 있어 피하지 못하고 냄새를 맡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배려해 지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노력하지만 본성이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그러려니가 잘 안 되는 이유로 모르는 척, 아닌 척, 잘난 척, 척척박사들이 가시같이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타인의 속사정과 인생을 속단하고, 단정 짓고, 폄하해선 안됩니다. 저같이 스스로를 바닥까지 끌어내리며 과잉 겸손 해도 안되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스스로를 추켜세우는 언행 또한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높은 자존감을 갖고 자기 주최적으로 사는 멋진 삶과 오만함은 종이 한 장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제가 그 친구에게 끝내 해주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싸가지가 없는 것은 절대 자랑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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