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에 관한 이야기.

by 윤슬


최근들어 마음 아픈 사연들을 많이 마주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얼마 전 글로 썼던 신비한 고양이와의 대화가 떠오르곤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아파 본 사람은 알지."
"그런데. 너도 왠지 이름 다른 아픔을 겪었을 것 같아.
"으응. 나도 아주 많이 아팠던 적이 있었지. 그래서 네가 겪은 아픔의 백 프로는 절대 알 수 없지만 내가 겪은 아픔의 최대치로 가늠해 보는 거야. 그래서 알 수 있는 거야."



저도 그 고양이처럼 아픔을 만나면 그의 아픔을 백 프로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겪은 아픔의 최대치로 가늠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늘 필요 이상으로 감정소비가 많습니다.


안타까운 건 감정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많이 아팠거나 아프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 이렇게 타인의 상황과 감정에 공감을 잘하고 그러므로 인해 필요 이상으로 감정 소모가 많다는 것이지요. 결국 따뜻한 마음과 깊은 심안을 가진 분들이 정신적으로 더 잘, 많이 아픈 것 같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순간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상대의 아픔을 발톱의 때만큼만 함께하기도, 때론 아픈 당사자 보다도 더 아파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 스스로에게 늘 감사해야한다. 행복할 때도, 슬플 때도, 아플 때도, 좌절할 때도, 그 어떤 때도 나를 떠나지 않고 오롯이 모든 감정을 백 프로 같이 느끼고 함께 해준 나에게 말이다. (신비한 고양이를 만났다 중)



저는 스스로를 참 많이 아프게 했습니다. 타인(가족포함)을 위한다는 핑계로 나를 돌보지 않은 죗값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돌아왔습니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기어코 아픔의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순간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상대의 아픔을 발톱의 때만큼만 함께하기도, 때론 아픈 당사자 보다도 더 아파하기도 한다는 사실을요.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는데도 정도가 있고 예의가 있더랍니다. 그 사람이 오롯이 감당해야 할 부분도 있고, 적당히 함께해야 하는 사실도 있더랍니다. 그것은 결코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배신 또한 아니지요. 결국 우리들은 진정으로 서로가 되어줄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함께 해주는 것마저 나를 최우선으로 배려하며 해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이제야 압니다.


여전히 잘 되지 않지만 조금씩 내려놓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해야 할 나에게 이제야 용서를 구하고 언제 어디서든 날아오는 총알에도 거뜬한 방탄 옷이 되어주려 합니다.



내가 존재해야 사랑하는 사람도 존재하고,

내가 존재해야 사랑하는 사람도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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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난, 나에게 넌.
아픔을 안은, 너와 나에게.



-생각이 걷는 길-



너에게 난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험에 빠트렸고,

선의라는 이름으로 손해를 입히고,

믿음이란 이름으로 배신을 맛보게 했으며,

기대라는이름으로 실망을 안겼지.


너에게 난

배려라는 이름으로 포기를 알게 했고,

비교라는 이름으로 자존감을 무릎꿇리고,

친절이란 이름으로 가장 불친절했으며,

죽음이란 이름으로 마지막을 말했지.


나에게 넌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슴 벅참을 선물했고,

선의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베풀고,

믿음이란 이름으로 굳건하게 했으며,

기대라는 이름으로 이루었어.


나에게 넌

배려라는 이름으로 성장하게 했고,

비교라는 이름으로 노력하게 하고,

친절이란 이름으로 좋은 사람이 되도록 했으며,

죽음이란 이름으로 다시 살게 했어.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울게 하지만 웃게 하고


너는 나를 .. 나는 너를..

죽게 하지만 또 살게 해.



그래서 영원히 너는 나고 또 나는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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