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
"아. 여긴 어디지?"
마치 전래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한적한 시골마을에 나는 서있다. 주변은 온통 꽃과 풀, 흙을 밟아 낸 좁은 길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집들. 나는 정면 큰 산을 마주 보고 조그마한 동네 어귀쯤에서 마을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다.
봄 즈음 같다. 햇살도 봄 빛깔, 마구잡이로 길에 난 들풀들도 초록 연두의 봄옷을 뽐내는 듯했다. 날씨는 몽롱한 듯 따사롭고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다.
앗. 갑자기 맞은편, 저기 저 먼발치서 짙은 갈색의 큰 멧돼지가 내게 달려온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집 채만 한 시커먼 멧돼지는 미처 피할 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내 눈앞까지 왔다.
"아악, 난 이제 죽었구나."
눈을 질끈 감은 찰나. 어라. 멧돼지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머리를 비비며 최대한 귀여운 척 애교를 부리는 것이다. 마치 귀여운 아기처럼. 멧돼지의 우락부락한 얼굴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미소가 나의 긴장감을 녹였다. 나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두 팔 가득 안아 멧돼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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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기분 좋은 돼지꿈이었다. 그것도 집 채만큼 커서 얼굴만도 두 팔로 다 안을 수 없는 큰? 꿈. 돼지가 나를 보고 가지껏 씩 웃어주며 애교를 부리는 기분 좋은 꿈. 아.. 나 임신 준비 중인데 이거 로또를 사 말아? 잠시 고민을 했지만 임신 테스트기를 먼저 해본다. 어랏? 정말 임신이다...
"아이 이름은 이 것 세 가지 중에 하나 하면 좋단다. 너희가 잘 상의해서 골라. 참 철학관에서 너네 둘이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애도 똑똑하고 돈 걱정 없이 잘 산다네. 그런데 너네가 자식 욕심이 많대. 그리고 딸 낳으려면 셋째는 돼야 놓을 수 있단다. 암튼 다 좋다니까. 엄마는 너무 기분이 좋네."
그렇게 첫째는 꿈속 멧돼지의 발랄함과 살인미소를 장착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동엽.
큰 잉어와
물고기 니모
"나 어제 태몽 꾼 거 같은데!"
"정말? 아직 준비? 도 안 했는데 벌써 태몽부터 꾼 거야? 뭔데 뭔데 말해봐."
"그러니까. 내가 작은 강가 나루터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큰 잉어 한 마리가 제 스스로 튀어 올라 툭 하고 내 옆에 떨어지는 거야."
"하. 큰 잉어면 아들 꿈인가? 우린 이제 딸 낳으면 딱 좋겠는데. 그래서 그 잉어 잡아서 집에 대려왔어?"
"들어봐. 근데 이게 꿈이 좀 이상해서.. "
"잉?"
"그렇게 튀어나온 잉어를 데려온 게 아니라, 내 낚시 바늘에 도로 입을 꾀어 내가 손맛만 봤어. 그리곤 그 잉어는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없고 바로 바다였어. 그 강가에서 좀 걸어가니 바다가 나오는 거야. 얕은 바다에 들어가서 물 안을 들여다봤는데 바닷물도 잔잔하고 물색도 에메랄드 색으로 너무 이뻤는데, 내 다리 사이로 알록달록 작은 물고기들이 몇 마리 돌아다니며 노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중 니모같이 생긴 젤 예쁜 물고기를 투명 비닐봉지에 물까지 담아서 조심조심 집까지 데려왔어. 어항에 넣어 키우며 보려고."
"아. 자기 말대로 꿈 내용이 좀 그러네. 이거 아들 낳으려다 잘못되고 딸 낳는 꿈인데... 에이 설마. 암튼 이번엔 딸 낳고 싶다 자기야.!!"
얼마 후 이세 준비를 했고 나는 임신을 했다. 보통 테스트기는 임신 초기 옅은 두 줄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진해지고 선명해지는 법인데 이상하게 더 이상 진해지지도 옅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더 지켜봤지만 변화가 없어 산부인과를 찾았다.
유산이었다. 이런 경우 극 초기라 생리혈처럼 모르고 흐르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임신 사실을 알아버렸고, 가장 중요한 건 절로 흐르지 않아 소파술로 임신 중단을 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두 번째 임신은 테스트기의 빨간 두 줄이 진해지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다 종료되었다.
전신 마취를 했지만 간단한 시술 정도의 수술이라 입원도 필요 없이 정신이 깨어나고 안정을 취한 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간 내가 너무 신경을 써서 일까 며칠 밤 잠을 설쳐서일까 그날 밤 나는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생생한 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핑크 코 돼지
여기는 내가 나고 자란 시골 친정집 마을이다. 나는 우리 집 바로 옆에 사시는 작은할아버지 댁 옆 길에 나와 있었다. 어느 한 곳을 응시하며 나는 공포에 떨고 있다. 내 시선이 닿는 저 먼발치 길 끝에, 큰 달마시안 개 두 마리가 서 있다. 아니 자세히 들여다보니 달마시안 개를 닮은 흰색에 검은 점박이의 돼지 두 마리가 나란히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돼지들이 곧 달려들어 나를 덮칠 걸 상상하며 작은할아버지 댁으로 급히 몸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찰나의 순간 돼지들이 이미 내 눈앞까지 다다랐다. 개중 한 마리는 자기 속도를 못 이겨 동장님 댁 바로 앞 내리막길로 미끄러져 내려갔고, 나머지 한 마리만 정확히 내게 달려와 두 발로 사뿐히 뛰더니 내 어깨에 무등을 타고 앉는 게 아닌가.
돼지가 무등을 타다니. 나는 그 순간 너무 황당하고 귀여워 웃음이 빵 터져 버렸다. 가까이 온 돼지는 검은 점박이 들은 모조리 사라져 있었고 온통 하얀 바디에 두 손, 두 발 그리고 코까지 다섯 포인트가 모드 핑크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내 어깨에 귀엽게 올라 탄 돼지의 두발을 감싸 쥐었다. 마치 작은 아기가 앙증맞은 순면 양발을 신은 듯한 촉감이 너무 좋아 절로 눈이 감겼고 나는 그 신비로운 촉감을 음미했다.. 순간 캄캄했던 내 머릿속에 빛 한 방울이 떨어지며 머릿속은 온통 빛으로 환해졌다. 그 순간 무언가 깨달음이 오듯 신비한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하늘과 초원이 맞닿은 듯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초록 초원에 잎이 울창하게 우거진 큰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나무는 마치 튼튼한 생명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늠름하게 서 있다. 순간 나는 꿈에서 꿈속임을 감지했다.
"아. 미끄러져 내려간 돼지가 오늘 이별한 아이고, 머지않아 생명력과 싱그러움을 자랑하는 이 나무처럼 건강하고 예쁜 아이가 다시 찾아와 주겠구나. 아 그런데 아들이야 딸이야? 아 몰라 좀 커도 핑크니까 딸이겠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애니메이션 속의 한 장면 같이 아름답고 찬란한 장면들이 눈앞에 놓인 사진을 더듬 듯 여전히 선명하다.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만져지던, 반짝이고 찬란한 나뭇잎들. 그리고 포근한 공기와 바람의 냄새.
그렇게 몇 달 후, 어쩌면 셋째였을지도 모를 둘째를 임신했고 그 후 어여쁜 딸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지윤.
마치 예견이라도 된 듯 이어지는 꿈들 덕분에 한 번의 유산을 겪고도 많이 아프지 않을 수 있었다. 참 이상했다. 아팠지만, 슬펐지만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나를 다독이는 듯한 그 꿈들에 나는 조금은 담담히 보내고 기쁘게 만날 수 있었다.
탯줄, 인연 줄
너를 마중 가던 험난한 길. 탯줄이란 신비로운 줄로 너와의 연을 맺고, 네 존재 이유만으로 때론 한계를 뛰어넘는 듯 초능력을 경험하기도 한단다.
그렇게 나는 부모가 되고 네가 성장하는 만큼, 그제야 나도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그렇게 우리는 탯줄을 끊어도 끊어지지 않던 질긴 인연 줄로 닿아 부모와 자식의 연이 되었단다.
고맙고 사랑한다.